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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마고리아 Phantasmagoria 2021

우리에게 일상은 더이상 평범한 삶의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주변의 풍경은 매 순간 변화하지만 그 안의 불안한 징후적 사건들은 아주 사소한 주변 안에 머무른다. 나는 주변의 사소한 의식주와 관련된 풍경과 언저리의 삭제 되는 풍경들을 본다. 그것은 그저 동시대 가치관이 달라져서 자연스레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어떤 삶의 위기로 인해 급격하게 소실되는 레이어 들이다. 우리에게 밀접한 것들이거나 필요로 했던 것들 혹은 다양한 감정적 표현이 가능했던 자리나 도구가 소실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고립된 상태나 억제된 환경으로 인해 풍경이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레이어 안에서 점차 익숙해지고 만다. 나는 그런 일상을 그린다. 그런데 그 일상은 마치 환영 과도 같은 일상이다. 그것은 과거의 일상에 가깝다. 어쩌면 박제화된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안에는 아직도 유효한 일상의 단상들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가 감지할 징후적 상황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우리의 기억이나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레이어일지도 모른다. 마치 모든 일상의 오브제들이 일루전으로 다가오며 완전한 미장센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 앞에 놓인 불안한 삶의 맨얼굴과 그 질감은 주변의 일상적 오브제와 장면 그 자체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치유란 사치와 같은 단어 일지도 모른다. 다만 다가오는 재난 앞에 또는 삶의 위기는 결국 익숙해지는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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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의 정도>

2019년이 다 지나가는 즈음 나는 작은 작업들을 시작했다. 매번 큰 그림들을 그리다 문뜩 풍경들이 분절된 작은 풍경들을 되도록 많이 모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깊숙한 장면의 부분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어떤 때에는 내가 갈 수 없는 장소들의 풍경을 올린 지인의 사진을 수집하기도 했는데, 설명하기 힘든 그 무게감이 그 풍경과 장면에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풍경의 자리는 어느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요즈음 유독 다른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공기, 온도, 밝음, 소리, 질감 등의 풍경은 고립된 듯 가라 앉고 있었다. 어쪄면 내가 풍경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면서 느껴지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나의 고립된 감정을 풍경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감정의 보상으로 그나마 고립된 풍경속에서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풍경이 그려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노동의 공간이나 사람들 몇몇이 같이 있을 수 있는 모임의 장소, 또는 밤새 빛을 비추는 써치라이트가 있는 장소의 풍경이었다. 몇개의 작업이 마무리가 된 이후 그 작업시리즈 제목을 “밝음의 정도” 라고 지었다. 그렇게 작업을 이어가던 중에 작년 이맘 때 길을 가다 유독 눈에 들어왔던 물체가 있었는데 그것은 멍이 들고 오래된 투명한 전구들 이었다. 식당이나 작은 가게들 그리고 철공소 같은 작은 노동의 공간을 비추고 있는 몇 안되는 전구 불빛이 풍경을 아우르고 있는 장면들은 미묘한 힘겨움이 느껴졌다. 조그마한 pub으로 오르는 계단을 비추는 미약한 붉은 전구, 끊임없이 공간이 리모델링 되고 있는 빈 가게의 조명들. 연약함 마저 느껴지는 이 단순한 미감은 마치 내 앞을 비추는 감정의 무게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투명한 전구의 유리 표면에 반사되어 보이는 굴절된 사방의 풍경을 품고 있는 지점이 나에겐 무척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마치 사방의 모든 풍경을 담고 있는 매우 기형적이면서 완벽한 구체의 캔버스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 작업들은 여기저기서 모아 온 작은 전구들을 어두운 화면 안에 하나씩 그려 넣었다. 마치 인물을 대하는 것처럼 두드러지지 않는 섬세함으로 그려 나갔다. 필라멘트가 발화하면서 눈은 멀어지고 주변의 풍경은 삭제된다. 대신 전구의 표면에 반사되어 보이는 희미한 풍경만이 존재한다. 빛은 없고 발화하는 오브제만 남는다. 그 오브제는 마치 누군가의 하루를 의미한다.

<토리노의 말>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오일 페인팅은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이라는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작업이다. 이 영화는 늙은 노부와 딸의 6일간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극 중에 두 사람은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면서 건조하게 반복하는 의/식/주 에 관한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두 사람 사이의 건조한 일상의 과정 속에서 하루에 하나씩 소실되어 가는 삶의 요소들을 통해 어떤 파멸로 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내가 영감을 받은 부분은 영화의 장면 언저리에 등장 하는 의/식/주와 관련된 ‘미장센들’ 이다. 나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들을 영화의 장면(미장센) 속에서 찾아내어 그려 나아갔다. 나는 일상의 몰락은 일상의 한 가운데 건조하게 공존하고 있는 사물들에 의해 잘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불을 필요로 하고, 물을 필요로 하고, 먹을 것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벨라 타르가 어딘가에서 인터뷰를 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의/식/주 의 덤덤한 삶 속에서, 어느 순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실행도 할 수 없는 것, 아마도 그때가 우리가 몰락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