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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 Art in culture Issue & People

긋고 재배열하는 오늘의 드로잉
양정무 [미술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것을 그리려고 파리에서 25년을 보냈느냐?”
윤향란 작가의 팔순 아버지의 전시회 소감이다. 개발새발 낙서 뭉치의 화면은 뭔가를 잔뜩 기대한 관객에게 허탈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어설프게 그은 막선과 캔버스 위에 너저분하게 붙은 켄트지 쪼가리는 그림으로 낼 수 있는 냉소감의 극치를 보여 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그림에 밀도를 매긴다면 윤향란의 것은 극히 낮은 수치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윤향란의 성글고 애매하게 빈 화면에 낙담했다면 안경수의 최신작으로 눈을 옮겨 보자. 갤러리비원에 새롭게 선보인 안경수의 그림은 언제나 그렇듯 낯익은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의 조율된 필선과 모노톤의 색감은 앞서 본 윤향란의 작업에서 느끼지 못했던 시각적 안도감을 충분히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느낌도 순간일 뿐이다. 그가 펼쳐 낸 산수풍경을 차분히 살펴 보면 그것이 우리 주변의 싸구려 인공자연을 재현했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그의 조형물 군데군데 하수구 구멍 같은 인공물이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릴 만한 풍경이 도처에 즐비함에도 왜 하필이면 그는 도시인들에게 일회용 휴식을 강제하기 위한 인공구조물을 선택했을까? 가짜를 통해 진짜를 알게 되는 우리의 현실이 자연을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서 윤향란에게서 확산된 허탈감을 느꼈다면 안경수에게선 응집된 허탈감이 깊게 전도되어 온다. 이 같은 허탈감 또는 공허함은 역설적으로 그간의 친절한 화면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매력임이 분명하고, 바로 이 점에 동감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이 두 전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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긋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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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 윤향란의 전시는 2008년 도쿄에서 연 개인전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5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다. 오랜만에 열리는 전시이지만 2005년 환기미술관 개인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캔버스에 켄트지나 화선지를 찢어 붙이고 그 위에 파스텔과 목탄으로 마구잡이로 선을 긋고 있다. 굳이 차이점을 짚어 내라면 종이 콜라주의 밀도가 더 성글어졌고 필선을 지배하던 기하학적 구조물도 더불어 한층 누그러졌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집요하게 거친 필선과 누더기 종이더미에 매료시키는지 그의 집요함에 호기심이 일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이 전시에 대한 멋진 소감을 한국을 방문한 노쇠한 영국 미술사학자에게서 먼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바쁜 일정 중에 삼청동의 미술관을 방문했고 이 때 얻은 한 움큼의 카탈로그 중에서 윤향란의 것을 꺼내 보이며 이 전시가 아주 맘에 든다고 나에게 말했다. 길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짧은 대화 속에서 그가 이 전시에서 작가의 솔직함과 편안함을 느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후에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작 작가의 부친은 전시장을 찾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이 허탈해한 세계가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 대중에게는 단조롭고 유치해 보이는 세계가 세계의 각양각색의 시각 환경에 장기간 노출된 연구자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서고 있는 이 극도의 대조적 사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언어학자가 유아의 발화 장면에서 인류 언어의 신비를 체득하듯이 그 미술사학자는 미술의 원초적 언어의 발화 순간을 윤향란의 작품에서 다시금 느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실 윤향란이 긋기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회화의 본질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작업의 시발점으로 사용하는 ‘긋는 행위(Act of Marking)’는 곧바로 인류에게 있어 말하기보다도 먼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상 그것은 라스코 동굴에서처럼 알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오기도 했고, 빗살무늬처럼 기하학적 패턴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윤향란의 긋기는 형상과 추상의 중간 지대에서 기민하게 움직인다. 특히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산책> 시리즈는 산책 중에 얻은 경험을 순전히 필획으로만 담아 내려 했다. 특히 긋기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헝클어진 선들은 어떠한 조형적 기대감도 무력화시키며, 나아가 그의 냉혹한 필선은 리듬감을 철저히 무시한 거친 선에 불과하다. 그가 걸었던 산책의 길은 아마도 거친 고독의 길이며 끝도 시작도 찾을 수 없는 허무한 길이다. 멋도 없고 기교도 없는 그의 필선은 너저분한 종이 조각들에 의해 다시금 잘려 나간다. 많은 화가들이 화면에 필획을 남겼지만 그의 것은 솔직담백함에 있어서 새로운 위치를 점하고 있다.
윤향란의 솔직함은 자기 작품의 철학화까지도 거부할 정도이다. 필획을 강조하는 많은 작가들이 노장 사상이나 불가의 선의 세계를 언급하고 있지만, 윤향란이 들고 나온 것은 일상의 무덤덤한 진실이다. ‘배추’와 ‘영수증’이 그것인데 배추는 그의 필선이 순수한 자기 체험 하에 묶여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서류 위의 <붓놀이> 시리즈도 그 정도로 읽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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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인 형상 찾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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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향란은 선이 반복된다고 느낄 때 한참 동안 작업을 멈춘다고 한다. 안경수가 형상을 찾고 만들어 가는 과정은 이보다 더 체계적이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자신의 작업 과정을 세 개의 층으로 구분 짓고 있다. 우선 그는 기억 속에 남은 정물을 재수정하고 다듬어 낸 후 그것을 공간 속에 재배열하여 이야기를 만든다고 한다. 다음 단계로 그것을 인쇄물로 만들어 내고 최종적으로는 이 인쇄물을 먹지 위에 놓고 ‘드로잉’을 통해 화면에 전사시켜 낸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래된 기억 속의 수집물 속에 출발한 이미지는 상상화된 풍경과 뒤섞인 내러티브 드로잉으로 다시 재편집된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자신의 평면 작업이 드로잉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막상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드로잉에 대한 전통적 개념이 흔들리게 된다. 먹지 위에 수많은 필획이 그어졌겠지만 그것은 거르고 걸러져 실상 화면에서는 어떠한 개성적 손맛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몰개성한 필선은 도심 속 인공적 산수 조형물과 결부되어 더욱 더 우리의 시선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도심 속 가로수를 휘감은 전구를 보며 생기를 꿈꿔 보고 인공 동굴을 헤매면서 진정한 자연을 느껴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편 안경수는 자신이 강조하는 3단계의 이미지 생산 과정과 별도의 단계를 이번 전시에 추가시켰다. 전시장 앞에 놓인 나무 박스로 만든 어둠상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어둠상자 속에 미니어처 인공 산수를 설치해 놓고 거기에 형광 물질을 골고루 발라 놓았다. 그것을 밝게 비추는 형광등 빛은 어설픈 야자수들과 함께 인공자연의 부자연스러움을 더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어둠상자는 근대 화가들에게 보는 방법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도구였다. 어둠상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밝은 형광 물질로 채워지고 커다란 구멍으로 우리의 시선을 어설프게 인도하는 그의 나무박스 속 풍경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카메라 옵스쿠라의 단일한 시선으로 세계를 체계화해 낸 서구의 근대적 시각 세계에 대한 냉소적 부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게 보면 그것은 오늘날의 인공적 조형세계에 대해 작가 특유의 거리두기를 유지하기 위한 소박한 장치이자 도구로 봐도 좋을 것이다.
앞서 나는 윤향란과 안경수의 작품에서 시각적 공허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물론 이 같은 공허감이 미술의 본질은 아닐지 모르지만 최소한 지난 반세기 세계 실험미술의 한 지류를 분명히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자세가 앞으로의 미술을 바꿔 놓을지 모른다. 볼거리가 지천으로 넘쳐 나는 이 시기에 윤향란의 반미술적 접근이 오히려 돋보일 수 있으며, 가짜 볼거리의 이면을 들춰 내는 안경수의 시도도 앞으로 계속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변적 태도가 거대 권력과 자본 앞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방편이라는 사실에 낙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미학적 도전이 그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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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앞서 말한 영국 미술사학자는 데이비드 바인드먼(David Bindman) 교수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초청으로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서구 미술에 나타난 흑인이미지에 대해 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