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미 heap
교외의 변두리 주변 곳곳은 어딘가로부터 밀려온 듯한 어떤 더미의 형상들이 있다. 차와 사람의 무덤, 쓰레기의 무덤, 무성한 덩쿨 무덤, 택배 박스 등 그밖의 무수한 더미들이 밀리듯 외곽으로 밀집되어 있다. 교외 사회는 마치 땅 끝에 와 있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풍경들이 마치 중심에서부터 언저리로 빗자루질 하듯 쓸려온 소위 더미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작업실은 내가 들어오기 전에 폐기물 창고로 쓰였다. 처음 이 작업실을 인수해서 들어 왔을 때 앞 마당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폐기물 더미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무덤 같은 형상이었다. 이곳은 그때와 지금의 용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더미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다시 더미가 되고 나의 더미들은 쌓여 간다. 내 그림은 폐기물 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애매한 가치의 언저리에 서서 그렇게 불안하게 서있다.
나는 더미 속에서 10일간 사생을 했다. 더미를 보고 크고 작은 어떤 덩어리를 그렸다. 그것이 무었이든 상관은 없었다. 다만 그들 더미와 내 그림이 같은 선상에서 있길 원했다. 야외에서 그림당 2시간에서 3시간의 작업을 끝내고 며칠 후에 다시 그자리로 그림을 들고 갔다. 그리고 그림을 현장에 설치하고 풍경과 그림을 오버랩 한 상태를 영상으로 기록했다. 나는 원본이 되는 풍경과 그림의 완전한 오버랩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 둘의 관계는 애초에 구분 가능한 관계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인정과 함께 풍경에 접근한다. 그런 균형이 덜 된 자리에서 그림 그 자체가 풍경 속에 하나의 레이어가 되고 풍경과 그림간의 균형을 찾아가는 불안한 시도를 거듭한다. 그림은 모본이 된 장소 안에서 또 하나의 레이어 혹은 풍경 속 오브제가 되어 그 장면(장소)을 흔든다. 그림은 풍경을 그림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존재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풍경 안의 또 하나의 레이어를 생성하는 일이다. 그림은 그렇게 실제하는 풍경과 늘 관계되어 있고, 또 흔들며 늘 불안한 상태를 드러내야 한다. 나는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