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lish | Korean

Ruins

나는 풍경의 부산물을 그린다. 많은 동료 작가들도 나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말이 나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부산물을 달리 표현하면 폐허라는 단어와 닮아 있다. 이런 풍경 안에 있은지 거의 15년은 되어가는 것 같다. 되돌아보면 이 작업의 시작은 꽤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경험 때문 이었는데, 그 때가 2009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하루는 연대 앞 서대문우체국 버스 정류소에서 평소처럼 버스를 기다리며 멍하니 길가의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길 건너에 건물이 철거된 그리 크지 않은 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 곳은 파괴된 잔해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방진포가 씌워져 조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철제 구조로 된 바리케이드가 가로막고 있었다. 어쩌면 평범하다 못해 흔한 장면으로 보이지만 내가 주목했던 것은 그 바리케이드에 그려진 풍경그림이었다. 요즘은 잘 찾아보기 힘든 바리케이드에 그려진 그 그림은 누군가 직접 그려 놓은 벽화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잔잔한 호수와 나무들을 채워 넣고 멀리 호수 너머 산을 그려 놓은 지극히 평범한 자연 풍경이었다. 그 순간 3개의 장면이 중첩되어 혼재 된 요상한 풍경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잔해와 방진포 더미, 바리케이드, 평범한 자연 풍경 그림,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이 여러 개의 레이어는 각자의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상충하는 모순된 풍경이었고 또 불편한 풍경이었다. 내가 그 동안 감각하고 동경해 오던 풍경 그림은 마치 도시 풍경에서 결핍된 자연의 일부를 조악한 이미지로 대체 하려는 동시에 은폐화 된 모순들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도시 내에서 자연을 대체하는 비슷한 사물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조명이 달린 인공나무나 식당 앞 작은 인공 연못에 떠있는 가짜 바위 같은 것들 말이다. 이들은 내가 바라본 풍경의 부산물 이었으며 멀지 않은 폐허의 풍경이었다.

자연과 사물들이 만들어낸 풍경 사이에는 모호한 감각들이 있다. 부조화한 풍경으로 주변을 자극하는 인공자연물은 사람과 사물 또는 사람과 풍경과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공의 재료로 만들어지거나 산업폐기물로 재활용된 인공 자연물들은 어떤 특정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레 나타나 지루한 풍경과 충돌한다. 때로는 형상이 매우 조악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낡고 부서진 외형에서 오는 혐오감마저 준다. 불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이 풍경들은 지루한 일상적 풍경 안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이상적 장소와 연관되는 풍경을 가리키며 기괴한 유토피아적 풍경으로 유혹한다. 도시 자연은 대개 인공적으로 조경된 관념적 경치들이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나고 자란 나무를 옮겨 심거나 거대한 바위를 깎아 자연석처럼 가꾸어 다른 자연물을 대체하는 부산물들은 서로 부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유명한 명소의 경관들을 모방한 관념적 조경은 인공자연물과 함께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들은 빠르게 폐허가 된다.

몇 년간 도시를 바라보던 나의 시선은 도시 너머의 교외지역으로 서서히 옮겨가기 시작했다. 나는 도시 외곽의 빈 구역들을 돌아보며 재개발이 진행되거나 정지된 공터의 풍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떤 곳은 재개발로 인해 모든 거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된 상태였고, 대부분의 집의 형태는 철거가 되어 반쯤 잘려 있거나 터만 남은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이곳에서 나의 작업은 마치 유적을 발굴하는 행위와 흡사했다. 이 폐허의 풍경은 누군가에게 기록의 장소이자 풍경이었기 때문에 사뭇 엄숙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풍경이 있다가 사라진 빈 터는 작은 폐허를 만들고 그 위를 다시 유동하고 있었고, 바리케이드를 경계화한 안과 바깥 현실의 시간은 마치 다른 시간성을 갖고 있는 느낌이었다.
“건축가들은 기존 건물을 부수고 공터에 새 건물을 짓기를 좋아한다. 작업이 편하고 내키는 대로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과 건물에 남겨진 시간의 적층이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얼마나 폭력적인가?”
네덜란드의 유명한 건축가인 ‘아틀리에 프로’의 공동창업자 한스 판베이크가 2013년 즈음 서울에 왔을 때 인터뷰를 한 내용이 기억이 난다. 그의 말은 재개발의 폭력성과 기존 건물을 재활용한 건축의 이점을 역설한 의미였다. 그런데 나는 그가 말한 ‘폭력적’ 이라는 의미가 개인의 기억과 서사가 한 사람이 감당할 만한 폐허가 되지못한 채 버려진 것에 대한 연민으로 느껴졌다.

나는 불시의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하루는 고립된 장소 같은 곳에서 사소한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풍경이 보고 싶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소소한 노동의 공간이나 밤새 빛을 비추는 모임의 장소 같은 곳이었다. 이런 공간들을 돌아보다 유독 눈에 들어왔던 물체가 있었는데 그것은 멍이 들고 오래된 투명한 전구들 이었다. 이 희미한 전구의 불빛은 식당이나 작은 가게들, 철공소 같은 협소한 공간을 비추고 있었고, 사방의 실내 풍경을 리플랙션 하고 있는 전구 구체의 유리 표면은 마치 누군가의 하루를 압축해 놓은 듯한 풍경처럼 느껴젔다. 이 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가 되고 곧 폐허가 되었다.

교외의 풍경 안에서 머물던 2021년 경, <더미>시리즈를 위한 리서치를 한 적이 있다. 작업실이 있는 교외 변두리는 어딘가로 부터 밀려온 어떤 더미의 형상들이 있다. 차와 사람의 무덤, 쓰레기 더미, 무성하게 뒤엉킨 덩굴들, 재활용 물품, 그밖에 잔해들 등 무수한 더미들이 밀리듯 도시의 외곽으로 유동한다. 교외는 마치 중심에서 언저리로 빗질하듯 쓸려온 풍경의 부산물들이 쌓여가는 소위 더미의 사회이다. 이 관심의 시작은 새로 이사를 온 작업실 때문이었다. 이사를 오기 전에 이 곳은 폐기물을 보관하던 창고로 쓰여졌다. 이 곳은 어딘가로 부터 밀려온 듯한 폐기된 큰 덩어리들이 있었고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불편한 풍경이었다. 이 후 새로 비워진 공간은 지난 폐기물들 대신 나의 그림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몇 개월이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예전에 보았던 폐기물 더미들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폐기물 더미들과 작업실에 쌓인 그림들이 서로 오버랩 되어 교묘하게 닮아 있는 더미들로 다가왔다. 이주된 그림은 다시 더미가 되고 나의 더미들은 폐기물 이거나 아닌 모호한 감각의 폐허 같은 것이었다.

나는 “불편함을 마주하는 풍경” 이다. 이 시대에 내가 살아온 모든 풍경들은 부유하듯 불안하게 무너지고 다시 채워간다. 나는 매번 그 사이에 있었던 것 같다. 잠시 공백의 시간을 갖는 사이의 풍경에 개입되어 풍경의 부산물을 보고 폐허에 대해 환기한다. 우리는 각자의 폐허를 본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주변으로 비켜있거나 소외되어 있어서 신체가 없고 언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 폐허를 경험하고 다시 풍경을 복구한다. 어쩌면 한사람의 폐허는 정돈되지 않은 풍경의 부산물이고 실체이며 날것의 신체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풍경의 역사는 폐허를 통해서 지속되었고 또 그렇게 나아간다. 그 이유는 폐허를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 번 낯설다.

안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