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lish | Korean

[어렸던 왕자]를 통해 본 삶에 대한 단상

김상철 [미술 비평가]

이른바 현대 한국화가 이룬 성과 중 하나는 바로 재료의 개방과 소재 표현의 영역을 전에 없이 확장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심미 체계로는 복잡다단하고 급변하는 현대 사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수용해 낼 수 없다는 자각과 반성에 따른 결과이다. 이는 곧바로 표현 방식에서의 혁명적 변화와 더불어 내용에 있어서도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변모를 가져왔다. 이를 이전까지 전통적 심미관에 충실한 작업들과의 구분하기 위하여 한국화, 혹은 현대 한국화라고 부르는 소이일 것이다.

재료의 개방은 과거 수묵 일변도의 재료관을 다양한 매체로 확장 시켰으며, 표현에 있어서는 보다 현실과 밀착된 내용들을 서슴없이 다루게 되었다. 재료 기법적인 면에서 보자면 수묵으로부터의 탈피를 전제로 이질적 재료에 대한 과감하고 적극적인 수용이 그 특징일 것이며, 표현에 있어서는 삶과 밀착된 현실 속으로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한국화의 외연은 무한대로 확장되었으며 급기야는 한국화의 정체성까지 회의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변화의 단계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어서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기운을 획득하여야만 그 생명력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오늘의 상황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내용들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평가하고 가늠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과 감상 체계를 수립하는데 있다 할 것이다.

작가 안경수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른바 혼합 재료라는 다원적 표현 방식을 통한 조형 작업은 원칙적으로 수묵화의 심미 원칙을 원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른 것이다. 특정한 원칙이나 규범에 얽매이기 보다는 분방한 개성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해석과 표현을 강조함이 두드러진다. 어둡고 깊이 있는 무거운 화면은 분명 수묵을 기조로 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유현한 수묵의 심미가 아니라 표출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실히 반영해 내는 재료적 기능이 우선시된다. 그럼으로 중봉에 의한 유려한 필선의 구사나 그윽한 발묵의 묘취와 같은 전통적 심미관과 감상 체계는 별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마련이다. 이는 오로지 새로운 감상 체계와 개별적인 조형으로서의 인식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이른바 한국화의 표현 영역 확대가 삶을 반영하는 현실적인 것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면, 이를 이어 나타나게 되는 또 다른 경향은 바로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시각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고 표출하는 것이다. 즉 일정한 값과 몫을 규정하고 이러한 틀과 꼴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개인적인 시각과 가치관에 의하여 대상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대 상황에 횡횡하는 개인 가치의 긍정과 확대를 반영하는 또 다른 기류이기도 하다.

안경수의 작업은 무채색 특유의 어둡고 퀭한 얼굴의 인물들이 깁스(Gip)를 한 상태로 자리하고 있다. 음습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구축에는 수묵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일단 표현 방식과 재료에 대한 장악력은 긍정될 수 있을 것이다. 섬세한 운용과 감각적인 재치가 더해져 구축해 내는 특정한 상황 설정과 표현은 여타 부수적인 수식 없이도 보는 이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깁스라는 상황은 장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를 속박하는 거추장스럽고 자유롭지 못한 물리적인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인 상황 설정일 것이다. 작가는 이를 “무엇인가에 의한 거치적거림”, 혹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일부분”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즉 깁스는 비록 장애, 혹은 불편함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작가의 화면에서의 읽힘은 오히려 신체, 혹은 정신의 부자유를 야기하는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러한 부자유, 또는 얽매임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작가의 화면 속에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생 텍쥐베리의 [어린왕자]가 자리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어린왕자의 내용은 장미꽃을 키우며 작은 별을 지키고 있던 어린왕자가 아끼던 장미의 오만함과 무지함을 일깨워주러 여행을 떠나 겪게 되는 다양한 인간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고 독해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단서인 셈이다. 작가는 굳이 어린왕자를 깁스를 한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왕자가 동심에서 찾고자하는 꿈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또 깁스가 ‘부자연스러운 얽매임’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 실체는 좌절된 희망, 혹은 망실된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왕자가 무의미한 일상의 삶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참다운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고 있다면 작가는 깁스를 한 어린왕자를 통하여 현실 속에서의 이러한 내용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이를 인정하고 용인하는 것이 또 얼마나 쉽지 않은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라는 삶 속에서 겪게 되는 무수한 물리적, 정신적 충격과 상처 속에서도 삶은 지탱되고 성장하게 마련이다. 성장에 따라 희망과 이상은 점차 희미해질 뿐이며,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본 일상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린왕자]가 아닌 [어렸던 왕자]인 것이다. 꿈과 희망과 이상이라는 것들이 삶이라는 현실 속에서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기성세대에게 있어서 꿈과 희망이나 사랑, 혹은 선(善)과 같은 가치들은 그저 향수와 추억으로 자리할 뿐이라는 자조적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장미꽃도, 함께 대화를 이끌어 갈 여우나 보아뱀도 없는 황량한 지구라는 행성에서 돌아와 뒤돌아 본 일상은 [어린왕자]를 [어렸던 왕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읽기가 유효한 것이라면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작가의 감회나 단상은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과 사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공통적인 관심사나 정형화된 공식으로 쉽게 간파되는 상투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내밀하고 주관적인 의미를 설정하고 이를 추구함은 이른바 현대 한국화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무채색의 암울한 화면 속에서 감상적인 내용들을 드러내고 있지만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병적인 상황의 무기력함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부조화한 현실 속에서 쉽게 잊혀져가는 어린 시절의 정서와 동심을 그리워하며 삶에 대한 진지하고 건강한 애정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마치 [어린왕자]가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느끼게 되는 “ 진실된 것은 두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상대방을 길들이고 사귀고 둘 만의 역사를 쌓아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작은 것이 쌓여 온전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라는 독백과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