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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놀이한다. 고로 존재한다.

공주형 [미술평론가]


만약 코르크스크루가 없다면 어떻게 와인 병을 딸 수 있을까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최근 이 문제가 즐거운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구두나 운동화, 못과 드라이버, 나무와 타월 등을 이용해 와인 병을 따는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이 네티즌들의 열띤 관심 속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와인 병 따는 것을 즐기고 누리는 본성적 행위인 놀이로 접근한 결과입니다. 한편 익숙한 도구 없이 와인 병을 따는 일이 곤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목적이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로 접근한다면 말이지요. 더군다나 방향이 제시되거나 주어진 일은 훌륭하게 처리해 내지만 예상치 못한 순발력을 요하는 일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른바 ‘매뉴얼 제너레이션(manual generation)’들이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예측 가능합니다. 시작도 전에 포기라는 단어부터 떠올릴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호이징하(Johan Huizinga 1872∼1945)는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Homo Ludens)』에서 인간을 유희하는 존재로 정의합니다. 여기서 유희 즉 놀이는 경제적, 사회적 가치가 중시되는 문명의 대척점에 선 인간 본연의 욕구이자 권리입니다. 그러고 보니 놀이와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0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셸링(Thomas Crombie Schelling 1921~  ) 메릴랜드대 교수의 게임 이론이 합리적인 삶의 선택과 연결 지어 인구에 회자됩니다. 놀이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규칙과 유사한 규칙을 발견합니다.

일정한 규칙과 특정한 도구는 놀이의 성립 조건입니다. 규칙과 도구가 없어도 삶은 존재합니다. 무척 혼란스럽고 막막한 상태로 말입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안경수(1975~  )가 그랬습니다. 삶은 지금까지 따라온 규칙과 사용해 온 도구의 효력 정지를 알리며 반납을 요구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규칙을 모색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도 않았습니다. 맞춤한 도구를 제공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예상했던 한바탕의 놀이는 거기서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신나는 폭죽 세례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즐거운 비명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폐장 시간이 다가오는 놀이공원의 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듯 우울한 아이들이 2006년 전시《어렸던 왕자》로 등장합니다. 한 눈에도 침울해 보이는 아이들은 입에 마스크를 했습니다. 한 쪽 눈에 안대를 둘렀습니다. 팔과 다리 등에 깁스붕대를 한 채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자유롭게 말할 수도, 제대로 볼 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단지 신체 특정 부위의 장애가 아닙니다. 상처 보호를 목적으로 감은 보호대들이 존재를 압박해 옵니다.

‘나는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어!’ 그림 속에서 중얼거리던《어렸던 왕자》들이 옮겨 간 곳은 ‘놀이방(playroom)’입니다. 작가가 설정한 공간 속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기구 속에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놀이방은 비상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 아닙니다. 놀이기구의 종류도 놀이 시간도 놀이방 안에서 지켜야 할 몇몇 수칙들도 어른들이 정해 놓은 것입니다. 아이들만의 독립적인 유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놀이방에서의 다소 불편했던 경험이 무용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비로소 아이들은 아이들의,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다음 번 놀이를 바로 이곳에서 골몰합니다.

2008년 안경수의 캔버스에는 음울한 아이들 대신 장난감 병정들이 등장합니다. 그만의 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장난감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매뉴얼은 이번 놀이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놀이의 규칙은 완전히 새롭게 바뀝니다. 손, 발, 다리, 몸, 등 각각의 인체 부위와 무기, 가방, 지뢰 모자 등이 예상치 못한 결합을 시도합니다. 애초에 장난감 회사가 의도했던 완벽하고 용맹한 군인의 형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머리가 없는 군인이 험준한 산의 한 가운데서 전투 중입니다.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는 장난감 병정은 두 팔 대신 다리를 붙였습니다. 매뉴얼을 숙지하지 못해 '잘못 만들어진(malformed)' 결과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형상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기에 겉모습이 흉측한 것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안경수 일련의 작업은 수시로 변하는 상황을 탐험이나 모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목적을 달성하는 어드벤처 게임(Adventure Game)을 연상케 합니다. 액션성이 아니라 어드벤처 게임에서 필요한 것은 논리적 전개를 위한 고도의 상상력입니다. 이쯤에서 스스로의 매뉴얼로 조립한 장난감 병정들을 캔버스에 붓으로 옮기는 놀이 같은 작업을 하는 그가 놀이를 하는 목적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자존감을 만들고,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기 위해 놀이를 합니다. 혹자는 긴장을 풀고,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 놀이를 합니다. 혹자는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화를 진행시키기 위해 놀이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놀이 뒤에 얻어지는 그 ‘무엇’을 목표로 놀이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목적이라면 놀이가 끝난 후의 기쁨이 아니라 놀이를 하며 당장에 생기는 즐거움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빨리빨리 촉박하게 일하듯 놀이하지 않습니다. 몰입하고 즐기면서 놀이하듯 작업합니다. 놀이하듯 작업하다 보니 하고 있는 놀이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을 갖습니다. 존재의 결핍을 확인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좀 더 놀고 싶다.’ 안경수는 삶에 대한 애정과 작업의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말이 알려진 매뉴얼과 도구로 시간낭비 없이 병을 따서 와인을 마시기보다는 좀 더 다르게 와인 따는 방법들을 즐겁게 고민해 보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자신만의 매뉴얼과 도구를 확보하는 과정은 진정한 주체가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놀이가 그러했듯이 존재를 탐험하고, 삶을 모험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