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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수의 그림 - 토사물을 그린 회화

정재호 / 화가



여기 어둑한 그림이 있다. 어둠속에서 흔들리는 잡풀, 공사장 가림막의 표면, 희미하게 자신의 피부를 드러내 보이는 사물들, 조명가게의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창백한 조명들. 무언가가 그려져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보이지 않고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작은 캔버스는 마치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는 창처럼 보인다. 창의 너머에 있는 세계는 지금 이곳과 다른 곳이다. 하나의 그림이 여기에 놓여 공간의 균질성을 무너뜨리고 관객이 응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멍을 만들어놓았다면, 그것은 화가의 어떤 의지와 행위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그림들을 보면서 고집스러운 의지를 가진 화가를 떠올리고 그의 섬세한 눈과 손을 떠올린다. 먼 우주로부터 하강을 시작한 시선은 광활한 공간을 점점 축소하다가 을지로의 한 골목길에 서서 무언가에 바싹 다가서서 찍고 있는 한 화가에게 머문다. 그는 수평으로 이동하여 근교의 작업실에 있을 것이고 거기서 어두운 밤까지 작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 하강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나는 어떤 고독감을 느낀다.

그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그렸다. 현란한 이미지들이 온라인 쇼핑몰의 상품처럼 유통되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와중에 그것들은 도시의 어느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그는 이걸 그리게 된 경위에 대해 ‘유람’과 ‘유랑’의 경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골목길 탐방이라는 도시의 프로그램을 따라 걷는 일군의 탐방객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을지로의 쇠락한 공업지대를 어떤 식으로든 기념하겠지만 결국 여기를 빠져나가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유람’이 다시 돌아갈 것을 전제한다면 ‘유랑’은 정처없는 것이고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을지로의 거대한 서사, 이를테면 근대화에 얽힌 흥망성쇠 같은 서사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흔히 찍는 장면들을 지나쳐서 어딘가에 머문다. 그는 거기서 붙박여 있는 장면들을 본다.

〈달력〉이라는 그림에는 달력이 없다. 얼룩으로 일그러져 있는 시멘트 계단에는 짙은 녹색의 페인트가 흘러내려 있고 거기에 언뜻 언뜻 숫자들이 나란히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아마도 그것이 달력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추측컨대 녹색 페인트는 인쇄용 잉크였을 것이고 인쇄공이 계단을 오르다가 흘렸을 것이며, 급하게 달력종이를 덮어 그것을 막음하려 했을 것이다. 얄궂게도 그 사소한 사건은 이런 식으로 각인되었고 을지로에 대한 서사의 일부가 되어 망각을 빗겨갔다. 〈덮게〉라고 이름 붙여진 세 점의 그림은 무언가를 덮은 거적때기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 속에 있을 것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림은 시선이 끝내 내부를 상상하지 못하고 표면에 펼쳐진 것에 머물게 한다. 그 표면은 마치 늘어진 살가죽 같다. 이를테면 늘어진 살가죽은 오래된 것이라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일 텐데 아직 살아있음으로 해서 어제와 오늘은 같지 않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그려진 덮개들이 그곳에 정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런 존재성을 대신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은유나 상징같은 것에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확고하게 물질적인 것에서 출발했지만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있는 것은 언어로 포섭되지 않으나 여전히 출렁이고 있는 어떤 불온함이다.

안경수가 비 물질성을 재현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그림을 보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그는 그가 보고 있는 장면은 단지 물질들로 이루어진 사물이거나 풍경만은 아니다. 전작들에서 그가 회화의 지층을 이루는 ‘막’을 말하면서 풍경들을 절편처럼 떠내어 캔버스의 표면에 무수히 많은 물감의 층으로 쌓아놓는다고 했을 때 그가 재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선이 부딪치는 물질들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대해 말할 때 집을, 나무를, 들판을, 부표를 그렸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말들을 생각해내야겠고 느낀다. 〈마감〉이라는 그림은 일과를 마치고 주인이 떠난 한 상점을 보여준다. ‘마감’은 문을 닫은 상태를 이야기하지만 또 다른 의미는 사물의 겉모습이 다루어진 어떤 상태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닫친 셔터문과 그 옆에 검은 덮개로 싸여진 덩어리는 그래서 상점이 닫친 상태이기도 하고 상점의 부속물들이 마감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언뜻 이 그림은 매우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각각의 부속들은 마치 종잇장처럼 얇게 저며져 있고 당연히 있어야할 양감대신 베일 듯한 모서리들을 가지고 있다. 그 모서리들은 사물과 사물들을 단호하게 구분하고 사물의 질감을 그 내부에 가둔다. 하지만 경계 안에서 사물성은 그대로 있지 못하고 운동하며 끝내는 경계 밖으로 터져 나오고 때로는 파편으로 흩뿌려지기도 한다. 이 그림속에서 사물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속에서 분투하고 있다. 망각과 소멸에 대항하는 운동성. 안경수가 닫친 상점의 귀퉁이를 응시했을 때 그가 거기서 본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안경수의 그림을 본다. 이번에는 그림의 내부를 보지 않고 그림의 표면을 본다. 사진같이 매끄러운 표면. 약간 불투명한 막이 씌어져 있는 것 같다. 그 막 안에 들어있는 장면은 신산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그림의 표면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화가가 회화에 대한 자의식을 결국 물감과 붓의 궤적으로 드러낸다고 한다면 그의 그림에선 그런 자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화가의 분신이라고 여겨지는 육체성은 철저하리만치 소거되어 있다. 나는 화가의 욕망이 그림이 외부로 향할 때 그림은 더 육체적인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외부는 이를테면 ‘페인터’라는 존재성을 욕망하기라고 할 수도 있고, 자신의 내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경수라는 화가는 어디에 있는가? 그림들을 보면서 “이번 그림들에선 전의 그림과 달리 흩뿌림과 흘림 같은 것들이 화면의 표면에 있지 않고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작들에서 그의 화면을 격양시켰던 붓질과 물감의 파편들은 이번 그림들에선 화면 속으로 들어가 흩날리는 철가루가 되고, 흘러내리는 얼룩이 되었다. 나는 그가 더 이상 그림을 ‘밖에서’그리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회화를 욕망하기 보다는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 말고는 다른 여지를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 ‘그 화가는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림이 지시하는 안쪽의 세계, 그러니까 어느 골목 어딘가에 여전히 서 있다고’.

안경수의 그림 중에는 바닥에 게워진 토사물을 그린 그림이 있다. 각기 다른 누군가의 토사물은 그들의 삶의 힘겨움을 가늠케 한다. 토사물은 욕지거리가 나올 만치 역겨운 것이라서 지금껏 어떤 화가도 그리지 않은 것인데 안경수는 이 그림을 첫 번째 구토, 두 번째 구토, 세 번째 구토라는 제목으로 세 번을 그렸다. 그 그림은 토사물이라고 밝히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마치 우주를 떠도는 은하계처럼 빛난다. 나는 화가가 끝내 발설하기 힘들었던 것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그림에서 안경수가 끝내 발설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해본다. 안경수를 떠올리면서 우주로부터 하강했던 시선은 이 그림을 통해 다시 우주로 되돌아간다. 그의 회화를 통해 세계를 보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