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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수의 ‘판타스마고리아’에서 한 달 살기 -


송가현 /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희미한 전구의 불빛이 주변의 풍경을 사방으로 머금고 있는 구체의 장면 속에 공간의 회귀와 시간의 몰락이 들어있다. 나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는 너를 지나 다시 나에게 되돌아오는 동안 발화하는 감정만 남은 채 타고 있다. 이 과거의 불빛은 기억과 상상의 덩어리를 끌어안고, 소진하며, 견디고 있는 우리 생을 비춘다. 휘어진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별자리처럼 빛나고, 목련처럼 낙화하며, 때로 기원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몸짓을 한다. 제자리로의 회귀와 시간을 통한 상실은 파국을 품은 존재의 몫이다. 짧고 가녀린, 몰락하는 존재는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폭발하는 생의 주기를 거꾸로 되감으며 자신의 시간을 삼켜 길게 늘이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다. 그렇게 끊임없이 빛과 어둠이 다르게 반복되는 곳, 판타스마고리아(1)는 간절한 열망의 장소가 된다. 그곳에서 한 달쯤 살아도 현실에서는 채 5분도 흐르지 않을 마법의 세계. 매번 상실이 두렵고 불꽃은 뜨겁겠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안경수가 자신과 세계, 혹은 캔버스와 풍경의 관계를 탐구하는 매체로서 자신의 작품을 위치시키는 태도는 여러 가지 이름, 또는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막’(membrane)이 있다. 막은 안경수의 작품 자체이기도 하고 작품을 구성하는 일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안경수가 바라보는 세계를 투영하는 ‘망’(screen)이다. 안경수의 회화는 막과 현실이 겹쳐 보이는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순간들은 무엇이든 투과 가능하고, 투명하지만 거기 있음을 알 수 있도록 가시적이며, 안과 밖,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어 있다. 안경수가 ‘풍경의 자리’라고 부르는 것(2) 역시 현실의 풍경과 막으로서의 풍경이 겹쳐져 공존하는 자리에 해당한다. 풍경의 자리를 찾아내고 그리는 것은 안경수의 회화가 성취하는 뛰어난 감각들 중 하나다. 안경수의 작품이 세계 속에 자리 잡는 방식은 이 잠재성의 이미지들을 현실 위에 덧놓음으로써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투명하게 겹쳐진 화면은 개별 작품의 차원에서 단절하는 동시에 연결하는 프레임을 통해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는 동안, 거듭된 창작의 결과물들은 시간과 공간을 잇는 일련의 연속체를 구성하며, 사물과 세계를 가로지르는 작가 고유의 평면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오랜 시간 회화라는 매체와 마주하며 쌓아올린 장면들은 그렇게 현실과 중첩되어 있다.

개인전 <판타스마고리아>에서 막은 유리 구체의 형태로 등장한다. 전구 속 빛은 광원(光源)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응축적으로 주변을 아우르는 풍경의 조건이다. 안경수의 화면에서 빛은 다양한 역할을 하며 회화적 차원의 고민을 대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빛을 다루는 태도는 빛의 회화적 재현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스크린에 빛을 상영하는 것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연작에서 안경수는 매체로서의 빛, 빛을 담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조명에 집중하는데, 전구의 투명한 유리면은 완벽하게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어둠 속 작고 투명한 전구는 필라멘트를 따라 빛나는 샹들리에가 되어 손님을 맞이하듯, 표면에 반사되는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풍경의 자리에 세상이 들어선다. 사물과 기억과 감정이 피어난다. 저마다 동그랗게 빛나는 조명은 타인의 모습을 한 자화상이다. 전시장에는 새초롬한 타자의 초상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장면이라는 이미지가 서사를 함축하고 생성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몰락하기 시작하는 것만이 지속할 수 있게 한다. 화려한 조명 아래 식탁을 차리는 요리사와 소녀가 있다. 그들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만찬은 끝났고, 그들은 함께 식탁을 치우는 중이다. 소녀는 슬픈 표정을 짓고, 요리사는 시름에 잠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항구에 정박한 배의 모습이다.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가슴 벅찬 빛이다. 밤이 새도록 보이지 않는 바다와 하늘을 그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 빛은 내일 아침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를 때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장면은 번쩍 다가와서 우리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웃는다. 장면은 언제나 그 자체로 완벽하다. 다만 그 안에서조차 피어나는 모든 존재는 매순간 몰락한다. 실패도 멸망도 아니다. 절망은 더더욱 아니다.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근거로 돌아감’(Zugrundegehen)이다. 그러니 우리, 화려하게 몰락하자.

몰락하는 장면 위로 왕국을 건설할 시간은 언제나 충분하다. 누군가의 하루, 한 달, 일 년을 바라보는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유화로 그려진 고전적 의식주의 장면들은 극도로 건조하고 문학적이다. 화면은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 파멸의 징후를 드러내고 한 세계를 미리 애도한다. 전구를 통해 사물을 본다. 빈 접시, 물잔, 바구니에 담긴 빨래, 걸려있는 수건, 오일 램프, 아궁이와 같이 깊고 진한 삶의 흔적들이다. 연속되는 사물들을 통해 눈앞에 주마등처럼 생이 펼쳐진다.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 <토리노의 말>(2011)에서 영감을 받은 이 사물들의 연작은 마치 하루, 한 달, 혹은 평생쯤 되는 누군가의 일상을 펼쳐놓은 파편들과 같다. 전시장은 통째로 투명한 구체 속 세상이 된다. 두 개의 장면이, 두 세계가 포개진다. 사물의 장면은 풍경의 자리에 놓이고, 파국은 곧 다시 새롭게 타오르는 세계를 위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각각의 사물들이 어두운 광원이 되어 타오르며 벽을 밝힌다. 안경수에게 풍경의 자리가 폐허나 공터에서 유난히 더 잘 드러나는 것은 단지 비어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곳이 잃어버린 장소의 원형(原型)처럼 작가에게는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와 자연의 무수한 장소로부터 작은 전구 속에 담긴 시간의 편린에 이르기까지 안경수는 그곳을 눈에 담고 빛을 비추어 스크린 위에 올린다. 사물과 세계를 통과하며 자신의 평면을 달린다.

몽롱한 기분으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전시장 문을 나서면, 좁고 혼란스러운 거리가 온통 감각을 교란한다. 확장될수록 끊임없이 프레임되는 관념의 화면 속에 갇힌 것처럼 어지럽다. 일단 23.5도쯤 기울어진 채 파랗게 빛나며 돌아가는 구체 위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스크린 속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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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등(幻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면.
(2) “풍경의 자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요즈음 유독 다른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공기, 온도, 밝음, 소리, 질감 등의 풍경은 고립된 듯 가라앉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풍경을 보는 태도가 달라졌기에 느끼는 오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편에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가 내 고립된 감정을 풍경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있다.” 안경수 작가노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