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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가 사는 법

조은비 [아트 스페이스 풀 기획실장]


발 밑의 땅이 물렁물렁하다. 그 위에 세워진 건물도, 나무와 풀도, 사람도 안정성을 획득할 수가 없다. 우리는 올 한 해 단단한 토대 위에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국가와 사회를 비롯한 근대적 장치들의 결속이 용해되어 유동적(liquid)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효율과 합리를 이유로 끊임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체제의 몰락과 실패를 목도하면서,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예민하게 시대적 징후와 불안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에 형태를 부여해왔다. 오늘날 예술가는 확실성을 향하지 않고, 불확실성에서 작동하는 경향을 띠는데, 특히 9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은 가변 설치, 협업과 연대를 모색하는 커뮤니티 작업 등 그 형식 또한 다변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설치나 영상이 주목 받은 반면에, 회화는 상대적으로 쇠퇴했다는 것이다.

물론 글의 첫머리에 회화의 시대가 끝났다거나, 회화의 존재 이유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대 미술에 있어 회화의 자기 고민으로 말문을 여는 것이 안경수의 작업을 비평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다시 말해, 현실 인식을 지닌 작가가 캔버스의 안팎에서 던지는 질문과 고민을 들여다보는 것 말이다. 회화라는 매체의 특성과 제약을 뛰어넘어 시대의 변화와 조응하면서 화가는 어떤 풍경을 담아낼 수 있는가. 이 글에서 나는 안경수의 작품에 나타나는 ‘공터’의 생명력과 잠재성에 주목하는 한편, 동시대 미술에서 나타나는 불안정성과 유동적 징후를 작가의 작업이 변화하는 흐름과 양상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본 것과 닮아있듯이

지난 몇 년간 안경수는 인공적 개발의 현장과 자연 풍경 사이의 중간 지대를 그려왔다. 작가의 시선이 시기별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자연을 둘러싼 인공적 풍경의 대비에서 비롯되는 ‘중간의 풍경’이나,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벗어난 ‘잉여공간’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는 것 같다.

「인공의 세계」(2008년 개인전)에서 파라다이스 장식물, 동물원이나 음식점 앞마당의 인공폭포, 인공동굴 등을 담은 풍경을 통해 작가는 인공 자연물에 대한 도시인들의 통속적인 기호와 가짜 자연의 조악함을 드러냈다. 여기서 인공적인 형상은 사람들의 이상적인 욕망을 투사한 어떤 껍데기들로, 오늘날의 결핍과 과잉을 담은 ‘외부의 풍경’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도시 조형물들은 사회제도에 의해 규정되고, 그에 따른 공간적인 질서를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의 비판의식이 드러나기도 한다.

풍경에 대한 작가의 의식적인 접근과 태도는 「바리케이드」(2012년 개인전)에 와서 조금 변화한다. 이태원으로 활동 범위를 옮기면서 작가의 시선은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삶이 공존하는 풍경에 주목하게 된다. 시스템 안에 명백히 존재하는 경계(인)와 같이 ‘애매한 것들’에 대한 작가의 본능적인 호기심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공사장 폐허를 비집고 나오는 풀, 건물 일부나 비어있는 공터 등으로 표현되었다. 안경수는 전작에서의 ‘사회적인 풍경’을 향한 의식적인 관심을 덜어내고, 주변에서 흔하게 목도하는 ‘공터’ 그대로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리고 쓸모에서 비껴난 주변적인 것이나 공터의 삐져나온 잔여물이, 바로 작가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인식을 통해 대상과의 실존적인 연대감을 형성한다. 이러한 자각은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가 미술의 장르적 경계 사이에 놓인 상황이나, 현실 사회적으로 하등 쓸모가 없는(것처럼 보이는) 예술의 잉여적인 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풍경을 향한 작가의 연대감은 그것을 관조의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것이 아닌 경험의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이때의 시선은 대상을 향한 개발 자본의 시선도, 버려지거나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의식적인 비판성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의 소재도 아닌 ‘풍경’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각색과 편집 과정에 의한 의도성을 버리고 작가가 발견한 어법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경험한 “본 것만을 그리자”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보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 대상을 이해하고 전유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방식은 평소 걷기를 즐기는 작가의 습관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다. 웬만한 거리는 무조건 걸어 다니는 작가는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 골목 구석구석의 숨은 풍경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원본, 즉 그리는 대상에 더욱 충실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풍경을 담는 작가의 태도는 어떤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웅변하진 않지만, 시선의 변화를 유도함으로써 현실을 더욱 사실적으로 관찰하게끔 한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인 이슈나 문제의식이 자신을 관통하는 질문이 되었을 때, 그리는 행위의 결과와 조응한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이와 같은 풍경에 대한 재탐구는 단순히 현실(풍경)의 모방이 아니라, 경험으로 탐침한 재현적 행위가 된다. 자세히 보아야만 보이는 이 납작하고 평평한 그림 안에는 이러한 작가의 고민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애매한 것’을 위한 자리

오늘날 미술가의 ‘이동’은 그의 존재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며, 작업에 있어 중요한 물리적인 조건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어떤 미술가들은 작품 제작에 있어 이동이 용이한 재료나 도구를 사용하거나, 자신의 정주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작업의 주요 맥락으로 삼기도 한다. 안경수는 최근 몇 년간 이동과 정착을 반복해왔다. 이것은 작가가 처한 불안정한 조건과 상황 때문이었지만, 그로 인해 달라진 주변 풍경은 그의 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최근에는 경기도 일산 외곽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작가가 걷고 바라보는 풍경에도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전작에서 도시 내부의 공터를 바라봤다면 이제는 도시 밖에서 도시와 위성도시의 중간지대인 ‘변두리’를 목격한다. 시점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사물이나 풍경의 한 부분을 확대하여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시야를 한 화면에 담는다. 전작에서 익명의 공터에 자리한 경계 지대를 포착했다면 신작에서는 사적인 장소감이 드러나는 누군가의 거주지를 그린다. 익숙하지만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도시 외곽의 풍경들, 가령 창고형 비닐하우스, 물류 창고, 컨테이너와 같이 집의 역할을 대신 하는 공간들은,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개발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안경수는 특정 맥락을 삭제하는 방식의 개발만큼이나 우리가 빠르게 망각하는 것들을 붙잡아, 마치 네 모습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화면에 정교하게 묘사한다. 흩뿌리거나 긁어 쌓아 올린 화면은 역설적으로 아주 평평한 평면의 질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평평한 공터’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것인지를 표면의 ‘흘러내림’을 통해 드러낸다. 표면에 흐르는 물감의 흔적이나 이물감, 흩뿌림, 긁기 등은 그것과 보는 사람 사이의 경계를 촉각적으로 구분하게 한다. 이때 표면에 흐르는 것은 분리하거나 떼어내기 힘든 것으로, 그림 안팎을 구분하게 하는 ‘파레르곤’이다. 데리다는 작품에 있어 부수적인 것을 의미하는 칸트의 ‘파레르곤(parergon)’ 개념을, 작품이 그 내용과 형식의 대립, 또는 화폭 안팎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요소로 재규정한다. 이런 해석에 기댄다면 안경수의 그림에서 ‘흘러내림’은 곧 그림과 그림이 아닌 것의 경계선으로, 모든 대립을 뒤흔들면서 작품을 발생시키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사이의 공간에 작품의 중심적인 요소와 그 밖에 이질적이거나 부수적인 것들이 함께 존재함으로써 오히려 작품에 있어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실체를 가능하게 해준다.

다른 신작에서 작가는 경계의 이미지를 더욱 구체화하여 아주 미묘한 순간의 흐름을 이미지로 포착한다. (2014)은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희미한 초저녁 풍경을 담았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이 ‘사이’의 공간에서, 경계에 위치한 존재의 필연적인 불안은 멈춤이 아닌, 끊임없이 움직임으로써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이동 가능성을 잠재한다. 동일한 제목의 또 다른 신작에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풍경의 안팎이 동시에 담겨있다. 창 밖 거리의 모습과 건물 내부의 형광등이 동시에 투과되는 유리창의 반사된 면은 내, 외부가 중첩되는 경계선이다. 이 풍경은 바깥에 있기도 하고 또 안에 있기도 한, ‘어슴푸레한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가능한 사유로서 그 식별 불가능성을 이미지로 가시화 시키는 것이 바로 안경수가 이 ‘애매한 것’들에게 부여하는 자리일 것이다.

요원한 풍경

우리는 아직도 개발 중이거나, 개발에 끼어 있는 바쁜 모습을 일상적으로 마주치면서 살아간다. 개발 중간에 끼어있는 이 위태로운 풍경은 계속해서 정붙일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며, 풍경이 되기를 거부하는 “미완의 풍경”이다. 이러한 중간지대의 비 장소는 그저 물리적인 공간과 주거의 기능적인 조건만을 제공하는데, 그곳은 정주의 개념보다는 잠시 머무는 곳에 더 가깝다. 일종의 ‘비 장소’로서 개발에서 비껴난 이 황량한 풍경들은 다시 말해서 자본과 개발의 욕망이 먹어 치우지 못하고 남은 잔여물들이다. 그렇다면 안경수가 실재하는 이 “미완의 풍경” 속에서 보고자 한 것, 본 것 그리고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서) 보게 될 것은 무엇인가.

“그림을 통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은 항상 풍경과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간섭합니다. (…) 언제나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은 한결같이 사실적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화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 나름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작가 노트 중에서

안경수는 작품의 서사적 구조나 회화적 표현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그림이 필연적으로 지니는 물리적인 제약을 극복하여 어떤 ‘징후’들을 포착하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는 곧 ‘보는(seeing)’ 문제를 둘러싸고, 화가가 자신과 세상이 만나면서 발생하는 감정의 변이를 드러내는 데에 적극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는 사이에서 경계로, 경계에서 공터로 나아가며, “풍경을 통해 배우고”, 개발과 개발 사이에 놓인 한국 사회의 무수한 빈 공간들이자, 잉여들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가 포착하는 대상이 지닌 ‘유동적 징후’는 우리가 처한 시대적 조건과 한국 사회의 공백을 은유한다.

개발이 중지되거나 불가능한 공간은 그저 끼어 있기 때문에 소생 가능하다. 이렇게 쓸모 없고 비루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가능성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풍경의 정면을 향해 걸어가는 작가는 이 가능성을 향해 계속해서 붓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어떤 장면과 마주하게 될지, 그림 앞에 선 그 누구도 아직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