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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 한가운데에서 -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안경수는 지속적으로 어떤 풍경을 그려오고 있다. 이는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작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인식하고 나서야 비로서 그에게 다가온 공간들이다. 이들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조형에서부터 도심지 외각의 변두리, 개발예정지, 간척지 등이다. 이런 곳은 중심에서 멀어진 장소, 특히 인공과 자연의 풍경 사이에 어느 한쪽으로도 어울리지 못하는 그 사이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공간들이다. 작가는 이를 사실적으로 뚜렷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작업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경향을 가진 작업들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기존의 풍경들이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장소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특정한 공간을 그려왔다면, 최근에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와는 다르게 불명확하고 어렴풋한 풍경들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작업들을 기존작업들과 함께 어떻게 읽어 낼 수 있을까?

이를 위해 필자는 새로운 경향으로 보이는 몇 개의 작업들을 통해 그의 작업적 태도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최근작들 중에 <징후>, <비밀 연소>, <가로등>, <트럭>, <요란한 불>과 같은 작업들로 이 작품들은 빛, 어둠, 바람과 같은 비가시적인 대상들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두운 저녁 혹은 해질 무렵의 시간대에서 빛의 세기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조금씩 그려오고 있었던 것들이다. 그가 그리는 풍경은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지만 지식적인 정보를 담아내기 위해서 그 모습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 앞에 나타난 생경하고 낯선 풍경을 발견하고 감각적 자극에 의해서 감정적인 풍경으로 옮겨내는 것도 아니다. 안경수가 시각적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과 감각 사이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현실(리얼리티)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이것은 ‘학습’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학습은 지식적인 정보를 획득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는 것에 가깝다. 이는 시각 정보에 기반을 둔 장소적 표면에 대한 인식과 함께 어떤 장소가 오랜 시간 획득해온 보이지 않는 공기와 냄새까지 포함하는 감각적인 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단발성 자극으로 인한 인상이 아니라 작가가 수없이 찾아가는 행위를 통해 그 공간에 익숙해진 후 습득하게 되는 인지이다. 따라서 ‘나’의 눈에 보이는 공간을 자기의 관점에 맞게 변형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작가 자신이 그 공간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다가서서 스며드는 상황에까지 도달하기 위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공간 자체가 표면적으로 고정되어 수동적인 박제와 같은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지고있는 생생한 현재성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끝내는 불가능한 목표일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나’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바라보는 현실을 획득하는 학습과정을 통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점진적 내면적 변화를 이루어 왔고, 이는 자연스럽게 작업에서도 변화를 가져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변화라는 것이 어떻게 발생하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는가? 거기에 더해 과연 비 가시적 현상으로 가득한 현실을 작업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라는 새로운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안경수의 작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선정적이거나 강렬한 자극을 주는 급작스러운 사건과 같은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는 그의 학습과정에서 서서히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내면적인 변화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불분명하면서도 분명히 차이를 나타내는 시간적 공간을 발생시킨다. 사실 그는 이미 이런 사이와 틈에서 나타나는 것을 포착하고 표현해 내는 것에 익숙하다. 안경수의 작업에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장소로써 이러한 상황에 내몰려 있는 공간을 잘 보여주는 <막>, <덮개>, <모퉁이>와 같은 작업은 화면 전면에 공사를 하기 위해 천으로 가려진 공간을 그린 것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대상을 드러내기 보다는 무엇인가를 숨기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이를 정당화하고, 다시 인위적으로 생명을 부여하려는 강제적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 또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구체적 대상을 확실성을 가지고 그리지만 그 표면만을 통해 지시하지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그려낸 이미지 너머에 그려지지 않은 부분에 숨겨진 현실에서 비로서 드러나는 의미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작업 표면을 보지만 그 뒤에 숨겨진 보여지지 않는 것들까지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한 <요란한 불>, <비밀 연소>, <징후> 같은 작업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이 작업들에서는 오히려 무엇인가를 포착하기 힘든 시각적 경험의 한계를 직접적으로 극복하려는 듯한 접근이 두드러진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 그리지 않던 감춰진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빛에 의해 그 뚜렷한 형태들이 불명확하게 뭉개지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이나, 태풍이라는 강력한 바람에 의해 평상시와 다른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기 직전의 찰나적 모습들처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포착할 수 없는 시각적 장애의 상황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어둠은 가시적으로는 불능상태로 무엇인가 구분하지 못하는 시각적 오류가 발생하지만 오히려 경계가 사라져 또 다른 것들이 새롭게 인지되어 깊은 공간이 생겨나는 무한성을 가진 공간이다. 그는 갑자기 등장하는 빛이나 타오르는 불에 의해 변화하는 어둠의 경계들을 통해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변화의 틈을 포착한다. 또한 태풍전야의 상황에 보여지는 징후는 말 그대로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유추하는 방법이지만, 사실 태풍 이후에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이렇게 기존의 작업들이 냉소적이고 확실성을 가진 단단하고 객관적인 표면처럼 보인다면, 지금 살펴보고 있는 작업들은 유동적, 서사적,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들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는 그가 대상을 취하는 방법인 오랜 시간 동안 어떤 대상들을 바라보는 행위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응시하는 상태로 서서히 침잠(沈潛)한다. 이렇게 새롭게 그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것은 찰나적 상황은 작가가 어느 장소에서 맞닥뜨리면서 획득되어 자신의 내면에 각인시킨 현실에서 얻어진 마술적 흔적들이다. 또한 이를 표현해 내는 데에 있어 그의 회화가 가지는 특징은 매끈함 혹은 얇은 표면이다.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표면의 레이어들은 중층적으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붓질에 의해 서로에게 스며듦으로써 화면 안에 뿌리내리는 것처럼 명확하지 않은 무한한 깊이의 심연을 가지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자신만의 경험으로 획득된 정보를 통한 이성적 인식과 그 이후에 발생하는 감각적 사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고요하면서도 요란스러운 자신이 인지하고 공감하는 현실을 그려낸다. 이와 같이 안경수는 자연스럽게 작업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념과 현실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그려내기 위해 학습한 일관된 자신만의 호흡에 기인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하기에 앞서 우리가 작가처럼 어떤 공간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공간은 이런 공간이고 저런 성격을 지닌다고 이미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이렇다’라는 관점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비슷할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모두 그리 다르지 않은 비슷한 이미지만을 상상한다면 그리고 어떤 변화도 차이도 감지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지루하고 비루한 삶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본다는 것은 얼마든지 나만의 방식으로 다르게 이해하고 변형시키고 자유롭게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다. 지금 현재의 세상에서 경험하는 감각은 갑작스럽게 신화처럼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해체되어 사그라진다. 따라서 이런 속도에 반응하는 감정들은 미묘하게 뒤틀리며, 더 이상 이성적으로 순서를 따르고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되는 순환적 반복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답답한 침묵으로 일관되게 만든다. 그렇지만 우리 삶 속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순간적 변화에는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것들이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도 모르게 쌓여서 발생하는 어떤 우연적 상황에 의한 변화에 의해 비로소 나타난다. 이로 인해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작은 오류들과 모순들이 가져오는 변화는 우리의 현실을 생기로 가득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안경수는 보이지 않는 변화로 가득한 현실 한가운데에서 대상을 바라보면서 이성을 바탕으로 한 관념과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상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그 미묘한 사이에서 자신만의 학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그려내기 위해 침잠하는 행위는 ‘나’혼자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보면 작가의 태도는 타인과의 공감을 위해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미세하게 조정하는 행위로 보인다. 결국 작가는 단순하게 고정된 관찰자의 위치에 머물기 보다는 그 안에 온전히 존재하는 여러 얇은 겹들이 겹쳐지는 미묘한 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내기 위해 이들과 함께 미끄러져 뒤엉키고자 한다. 그렇기에 안경수는 찰나적으로 지나가는 변화들을 응시하고, 태세의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그가 만나고 접촉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