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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폐허
On ground /
안경수 작가 개인전

현시원 [큐레이터, 시청각]


“폐기물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아이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사물세계, 즉 커다란 세계 안에 있는 작은 세계를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다.”

발터벤야민, ‘공사현장’, 『일방통행로』

불완전한 공터와 불완전한 폐허. 안경수의 그림 속에서 폐허와 공터는 ‘불완전함'의 각기 다른 이름이다. 이 말은 작가가 그리기의 대상으로 삼은 풍경이 시작과 끝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중간’ 단계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또한 그리기의 측면에서 작가가 밀어붙여 보려는 그림의 상태가 어느 정도 불완전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경수의 그림은 작가가 걸었던 서울 이태원 일대 보광동이라는 장소에서 시작한다. 이곳은 2012년 겨울 이태원에 위치한 전시공간 ‘꿀풀’에서 전시를 하며 자주 오갔던 곳으로 작가에겐 거주의 장소가 아니라 ‘걷기’의 장소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타지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사람들과 폐기물에 가까운 낡은 사물, 오래된 건물과 공사장 터의 공존을 또 다른 가능성의 풍경으로 바라본다. 그는 몸과 시선이 함께 움직이는 걷기를 통해 이 황망한 장면들을 포착했을 것이다.

작가가 화면으로 데려온 거리의 건물, 공사 현장, 가로수, 실내의 벽과 바닥 등은 모두 공터에서 솟아난 시간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시간동안 걸으면서 보았던 실제 장소는 점점 누락된다. 정확히 말해 그는 건물의 일부, 공사장의 폐허 일부, 벽과 바닥의 일부를 그려냄으로써 전체를 누락시킨다. 부분들로 배치된 그의 그림은 풍경의 전체적인 조망을 불완전한 시도로서 남겨둔다. 조각난 풍경은 군데군데 퍼즐처럼 배치되어 있다. 대신 작가는 시간의 쌓임과 그 안의 불안전한 대기를 그림 안에서 감각적으로 증폭시킨다. 그의 그림들은 작가가 마주한 실제 풍경이 자신의 눈과 손에서 멀어지는 것을 일정부분 ‘방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리기는 화면 안에 올라간 대상을 어느 정도 방치하는 것으로 그림의 온기를 보존한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규정할 수 없는 대기권 안에서 작가는 공터와 폐허,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땅을 그림 안에 공존하게끔 한다.

작가의 그리기는 풍경을 재현과 환영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공터와 폐허의 존재를, 그러니까 관람자가 온전한 공터나 폐허의 감각을 조우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한다. 화면 전체를 채운 하얀 점과 긁어낸 듯 미약한 어둠의 자국을 담아낸 건물 내부는 화석이 되기 직전의 인공물이 풍기는 어떤 징후 같은 것이다. 그림 속 풍경은 눅눅한 공기와 습한 온도를 감지하게 할 뿐 실제 거리의 현실을 감추거나 밀어낸다. 건물의 잔해와 풀이 공존하는 공사장 터의 상황은 거리의 휘몰아치는 소음과 주변 질서의 영향권에서 떨어져나와 외따로 선 풍경이 된다.

-a bunker-라고 이름 붙은 작품을 보자. 두 그림은 거리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건물의 주차 공간을 그린다. 서로 다르면서도 유사한 두 그림의 배치는 흥미롭다. 작가의 시선은 건물 내부로 진입하지 않으며 거리를 걸으면서 우발적으로 발견한 건물의 ‘틈’을, 밖에서 보고 그린 것이다. 바깥에서 그린 풍경. 작가는 내부에 의외의 것이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 오지는 않는다. -a bunker-의 붉은 벽돌과 흰 벽, 푸른 창문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풍경의 바깥에 서서 겉을 훑어본다. 화가가 재생시켜놓은 유사한 구도의 건물 주차장 구조는 표면의 질감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건물 안팎을 흘러내리 물감의 존재다. 이 물감만이 풍경의 내부로 들어가 여기저기 어디든 갈 수 있는 기체처럼 화면을 채운다. -an empty lot- 시리즈를 비롯해 숲을 그린 -forest-에서도 미약하거나 때로는 압도적으로 느껴질 만큼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감이 있다. 이 흘러내리는 물감은 시공간의 분위기를 좌지우지 하는 비나 눈과 같은 대기의 상태를 어느 정도 모방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공적인 덧붙임이 아니라 방치된 시간의 자국으로, 또 그림의 눅눅함을 배가시키는 요소로 존재한다. 눅눅한 느낌의 화면을 만들어낸 주체는 누구인가? 화가일 수도 있고 거리의 가로수, 하수도, 공터, 온갖 사물을 만들고 바라보는 모두일 수도 있다. 안경수의 그림에서 공터의 자리는 남겨진 폐기물, 못, 버려진 물건의 잔해들에게 넘겨진다. 공사장 가림막을 뚫고 풀이 솟아나는 장면은 가까이에서 바라보야만 얼굴을 내미는, 풍경의 가려진 재료들이다. 이 재료는 작가의 물감만이 남길 수 있는 크고 작은 녹색 점 자국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의 그림은 보광동에서 시작되어 다른 공터들로 향해 흩어져 나간다. 비어있는 자리를 뜻하는 공터는 사실상 불가능한 환영 아닐까? 공터는 가까운 곳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실내의 조명을 그린 -Lightning-, 얼룩지고 낡은 계단을 그린 -stairway-, 공사장 무지개떡 패턴의 가림막을 그린 -our flag-도 작가의 다른 그림에 비추어 보자면 ‘공터’의 다른 표현이다. 작가는 화면의 여러 부분들을 비워두고 풍경의 조각난 미니어처를 그린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덥지 않아 보이는 풍경의 자리는 그 자리가 품고 있는 미시적인 세계를 수면 위로 올린다. 계단, 벽, 바닥, 조명이 달린 천정을 담은 안경수의 ‘실내’ 풍경은 무엇의 ‘배경’이 되었던 자리를 눈앞으로 바짝 끌어당여 그 자리 자체를 보게 한다. 드라마틱하지도, 스펙터클하지도 않다. 보도블록의 패턴을 그린 -a brick road-는 작가가 느꼈을 비약적인 관계의 ‘놀이’를 보는 이와 공유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난다. 누락된 시간의 흔적을 상처처럼 각인한 짙은 보도블록의 표면은 변화하고 움직이는 풍경의 한 찰나다.

안경수의 풍경은 이질적인 재료들 사이의 비약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풍경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기서 풍경이 ‘된다'는 말은 안경수 작가가 쓴 글에 등장하는 단어다. 작가는 글에서 '풍경이 된다'는 문구 앞에 ‘미완’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작가의 그림 안에서 미완의 장소는 그림 안에서 풍경이 되는 시간을 스스로 직조해나간다. 그는 그리기의 과정을 통해 의외의 것과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풍경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 질문하는 것일까? 더러움 속의 깨끗함, 태평함 속의 불안함, 눅눅함 속의 쨍한 조명 등과 같이 대치되는 감각은 이질적인 것들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흔적, 잔여물처럼 침묵 속에 남아있다. 작가는 무엇인가를 도드라지게 하는 배경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전부’인 공백의 장면을 쫓아간다. 이 공백은 필연적으로 미완성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미완성은 지금 이곳의 풍경에 관해 바라보기를, 담기를, 다시 배치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어떤 기대이거나 나아가 화가로서의 다짐일지 모른다.

안경수의 풍경은 꾸준히 변화해왔다. 그는 인공의 세계(2008년 개인전)와 바리케이드(2012년 개인전)를 지나와 자신의 그림을 ‘풍경되기’의 측면에서 수행한다. 이번 전시장에서 자주 보게 되는 잘금잘금 쪼개진 듯 금이 간 그림 속 바닥과 벽면은 작가가 풍경에 대해 펼쳐놓은 생각의 흔적이다. 작가는 자신이 걸었던 거리와 그 길에서 포착해내고 다시 떠올리는 풍경을 통해 반복해 겹쳐지는 풍경의 습성을 발굴해낸다. 시간의 때를 입은 풍경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매 시간 다른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풍경의 상이한 조건들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