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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풍경

김미정 / 아르코 미술관 큐레이터



작가가 마석가구단지를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 삭막한 풍경에 꽤 놀랐던 기억이 난다. 분명 사람이 살고 있다고 했는데 삶의 냄새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던 메마른 풍경이었고, 보이는 것은 오로지 컨테이너 박스와 낡은 건물이 전부였다. 그런데 ‘삭막하다’라는 감상은 컨테이너, 건물 등 단순히 풍경에 등장하는 대상들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풍경의 요소들 때문에 감상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풍경의 인상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부터 시작된다. 안경수 작가는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풍경에서 본 것뿐 아니라 그 풍경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캔버스에 담기 위해 풍경을 분할하고 분석한다. 사실 작가의 회화는 이미 폐허, 공터, 막, 이동, 경계 등 중요한 키워드들로 이야기된 바 있으나 이를 분석하기 전에 풍경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선험 되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주변 공간들을 경험하고 지각하며 관계 맺는다. 그 공간들은 도시/삶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존재하며 언젠가 우리에게 익숙한 빌딩 숲이 될 수도, 혹은 영원히 버려진 상태로 남을 수도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재개발의 논리로 공간의 입장을 규정하거나 비판적, 감상적 태도 대신 작가는 자신이 지각한 그 모호한 공간을 어떻게 담아낼지에 집중한다.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는 그 주변을 오랜 시간 동안 관찰한 후 그 감각의 결과를 캔버스에 몇 겹의 층으로 쌓는다. 그 레이어들 때문에 작가의 풍경화는 분명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공간임에도 낯설기만 하다. 그렇게 규정되지 못하기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린 작가의 작품은 이(異)계의 풍경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공간의 질감
안경수 작가는 ‘경계로서의 풍경'에 대한 질문을 ‘막(membrane)’을 통해 풀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막’은 생물학적 용어이며 표면을 덮는다는 단일한 의미/형태가 아닌,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관계하고자 하는 작가의 작품 자체를 일컫는다. 그 때문에 경계의 존재들, 즉 번화한 도시 사이의 공터, 공사장, 감시탑 혹은 그 곳에 있을 법한 낡은 기둥 등의 사물들이 화면의 중심이 된다. 작품의 제목 또한 등장하는 상황, 사물, 풍경을 정직하게 지칭한다.
그러나 모든 풍경을 제목에 따라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앙상하면서도 빽빽한 나무숲이 건물을 가린 supermarket (2016)을 보고 작가에게 왜 작품의 제목이 슈퍼마켓인지 물었다. 작가는 그 건물이 슈퍼마켓이기 때문이라고 덤덤히 대답했다. 작가에게는 당연했을 그 답을 듣는 순간 회화의 내외부에서 다층적인 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회화 안에서 앙상한 나무숲이라는 하나의 막 때문에 거대한 슈퍼마켓은 슈퍼마켓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일상적인 삶과 시간을 상실하며, 납작한 건물의 정면과 선으로 가득한 나뭇가지의 결들은 풍경 전체에 평면성을 부여한다. 또한, 대상을 가림으로써 화면 밖에서는 관객을 풍경과 분리하는데, 이 분리는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풍경과 자신을 감상적으로 동일시하고 내러티브를 부여하는 행위에 제약을 걸며,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들, 레이어들과 표면에 집중하게 만든다. 막은 이렇게 회화의 내외부에서 작용하며 온전한 하나의 풍경 그 자체에 몰입을 유도한다.
supermarket, eve(2016), curtain(2016)뿐 아니라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섬세한 필치와 꼼꼼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깊이보다 평면성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공간적 깊이를 구현하는 대신에 작가는 그 공간을 경험한 자신만의 온전한 시선을 화면 위에 쌓아간다. eve를 자세히 살펴보면, 엉켜있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붉은 붓 자국과 물감을 흩뿌려 만들어진 흰색 점들 등 수많은 결들이 표면을 덮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결들 또한 하나의 막으로 회화 안에 존재하며, 이를 통해 풍경은 특유의 질감을 획득한다.
회화에서 질감이라고 하면 물감을 통해 캔버스 표면에 쌓이는 물질적인 것과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들(컨테이너 박스, 천막 등)의 특유의 재질에서 오는 시각적 질감에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풍경화에서는 이 모든 요소가 화면에 얽히면서 풍경 ‘자체’의 질감을 만들어낸다. 마석가구단지를 그린 home sweet home(2017)은 그저 잘 묘사되었거나 장소 특유의 메마르고 어두운 분위기가 잘 표현된 풍경화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풍경을 채우는 컨테이너 박스, 가림막, 전선까지 마치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붓질과 그 위에 다른 붓질, 선과 물감의 흔적들이 얹히면서 만들어진 이러한 표현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화면을 덮은 이 레이어들은 시각적 재현을 위함이 아니고, 공간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나 불필요한 왜곡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본 그대로, 그 장면을 최대한 닮아가고자 한 기록이자 시간의 층이다. 결국 안경수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풍경 자체의 질감은 순간적 인상의 결과라기보다 풍경과의 교류를 통해 나온 끈질긴 관찰의 결과이다.

‘같지 않은’ 풍경
풍경과 관계 맺으며 그곳의 막을 살피는 것, 안경수 작가에게는 이 긴 시간을 요하는 행위가 곧 작업의 시작점이다. 작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계의 공간들이 변화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와 자신의 작품 사이에 틈을 만들어낸다. the lay of the land(2017), single painting(2015)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풍경화를 원래의 풍경에 갖다 놓는다. 작품과 풍경의 경계를 최대한 일치시켜 맞춰놓기에 두 풍경의 연결만 본다면 어색함이 거의 없다. 특별한 지지대 없이 세워진 작품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내 쓰러진다. 이 장면은 영상과 사진으로 전시된다.
single painting 시리즈 중 하나인 clearing(2015)은 작가가 머물렀던 독일의 레지던시 근방 공터를 담은 작품이다. 풀의 선명한 초록색과 역동적인 선과 획의 겹침이 뚜렷한 이 작품이 실제 풍경에 놓이는 순간 장면의 유사성으로 인해 두 풍경은 연결된다. 반대로 모텔의 가림막을 그린 new green(2017)과 a buoy(2017)은 바람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가림막 때문에 기존의 풍경과 전혀 경계나 선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은 캔버스와 실제 공간이라는 매체의 이질감이 아닌, 같지 ‘않은’ 장면의 병치로 인한 것이다.
이렇게 모본(작가의 말에 따르면)과 회화가 ‘같지 않은’ 풍경이 되는 과정을 작가는 공간을 ‘흔든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보다 두 개체 사이가 더 흔들리는 지점은 두 풍경이 병치 되어 있을 때보다 작품이 넘어져 풍경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작품이 쓰러지고 그 자리에 실제 풍경이 자리하면서 작품이 가린/열어놓은 장면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했기에 회화에 담긴 최초의 장면과는 다소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 때문에 작품이 쓰러지는 장면은 공간의 불안정성에 주목하게 하면서, 장소를 낯설게 만든다.
이처럼 회화와 풍경의 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을 작가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개인전 《막》에서는 작품을 설치하는 방식을 달리한다. 작품 뒤에 가벽을 설치하고 관객들이 막(작품) 뒤에 가려져 있는 다른 층위의 풍경들을 발견하게 만든 것이다. 풍경과 거기에 가려진 장면의 층들을 인식하게 하는 이러한 설치 방식은 또한 작가가 일관하는 풍경에 대한 태도가 여전히 작가의 작품에서 중요한 지점임을 역설한다.

풍경은 어떤 부연 설명이나 언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사유의 대상이 된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화가가 풍경을 그렸고 표현의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그러나 안경수 작가에게는 표현의 방식보다 여전히 그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풍경을 그려온 작가가 지금 마주한 고민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여전히 작가에게 있어 풍경에 접근하는 방식, 태도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며, 그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그리는 행위보다 먼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풍경이든, 사물이든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 놓인 경계의 존재들을 그려나갈 것이라 짐작한다. 그들과 공존하면서도 끊임없이 낯선 부분들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기에 비록 본 것만을 그린다고 해도 그 세계는 늘 낯설 것이다. 회화의 역할이 늘 궁금했지만, 안경수 작가의 회화는 어쩌면 이 세계와 그 너머의 이(異)세계를 연결하는 막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