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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反풍경의 사이(間)


이관훈 [큐레이터, project space 사루비아]



2010년 이후 안경수의 관심은 사회적 풍경에서 일상적 풍경으로 옮겨왔다. 좀 더 분석하자면, 감각적 표면에서 내면의 리얼리티로, 풍자적이고 은유적인 것에서 현시적이고 직접적인 것으로, 연극적인 상황에서 관조적인 태도로 변해오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데, 그의 시선과 태도는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져 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간의 작업 변천과 여러 번의 만남에 의한 필자의 견해는, 자기의 빈 그릇을 세상에 던져놓고 미술사회의 시스템(외적충동)의 경험과 자아의 내면적 실험(내적충동)을 통해 ‘작가로 살아가기 위한’ 절실한 정면승부를 걸어온 결과가 아닌가한다.

그가 처한 내면의 갈등, 그러니까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할 것인가의 프레임 설정에 있어서 계속 자신에게 주어진 그림의 안과 밖의 경계에서 맴돌다, 2009년 9월경 무심코 서대문구 창천동 길에서 마주친 바리케이드에 그려진 풍경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 그 풍경의 모습은 언덕 위에 다세대주택들이 있고 그 앞쪽에 철거되다만 건물전체를 파란천막으로 뒤덮은 모습이, 그리고 재건축을 위한 방어벽과 그 벽면에 그려진 자연풍경이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중첩되어 작가의 한 시야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 뜬금없고 충격적인 풍경은 오래전부터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의 일상적이고 보편적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재개발이나 인공정원에 관한 비판적 시선으로 회화·사진 방식, 공공의 개념적 접근 등을 15여 년 전부터 이미 실천해온 행동주의나 관조주의 경향은 최근의 현대미술에서 그렇게 신선한 형식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권력행사가 계속 반복되고 이를 위안삼아 인공물로서의 자연적 환경을 만드는 것에 비판과 재해석은 지속적인 의미를 낳을 수밖에 없다.

제도권에서 바라보는 이러한 입장과는 달리, 그에게는 새로운 외적 풍경의 발견이라는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발견의 미학’이 새로운 창작의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발단은 외적충동이전에 내적충동이 먼저 발현되어 그의 시야를 통해 새로운 관점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리케이드에 그려진 그림은 어제오늘 본 것이 아니다. 그의 끊임없는 화두 속에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그리며, 실험하고 충돌하며, 대화 나누며 텍스트를 만드는 즉 이러한 작용을 반복·순환시켜 인식적 사고를 유연하게 하여 자기만의 자생적인 언어로 발전시킨다는 점에 필자는 주목하게 된 것이다.

창천동에 있는 바리케이드 풍경의 시발점으로 그가 돌아다니며 발견한 ‘사이의 풍경’(중간풍경, 중간경)들은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원, 아파트, 공유지, 재개발건축시공 터에 완성된 조경이나 방어벽에 그려진 풍경들이다. 더불어 시야가 넓혀지며 주거지의 폐허건물이나 길모퉁이의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흔적들까지 미학적인 요소로 끌어들인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보거나 보여 지는 대상에 따른 프레임을 감각적으로 조종해가며 1호에서부터 500호까지의 다양한 형태의 그림들을 표현해냈다.

내용 또한 다양하다. 그 대상들을 보며 작가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아주 작은 단위의 미시적 언어들을 텔레파시와 같은 직관으로 그의 프레임 속에 재배치된다. 전체적인 뉘앙스는 침침하고 우울하며 빈 곳을 찾아 헤매는 사회적 고아처럼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헐벗은 듯한 꿀풀의 거친 공간과 잘 교우한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이들이 자리할 만한 특정적 장소를 찾아 나섰고, 재건축될 반 지하에 복도와 네다섯 개 공간의 적재적소에 위치시켰다.

이들은 마치 그 장소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편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쓸모없게 되었지만 문화 예술적으로 쓸모 있는, 그래서 더욱 가치 있는 이 공간은 자본주의 이기로 인해 버림받을 수밖에는 중간 풍경들과 닮아 있다. 하루살이나 시한부인생처럼 항상 주변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이러한 공간과 삶은, 언제 그 가치를 돌려받을 수 있는지, 자본이 돌고 도는 소용돌이 판에는 의문스럽다.

그 벽으로부터, 그 공간으로부터 생성된 장소의 역사는 지워질 수 없다. 그 세월의 겹만큼 사람이든 기억이든 잔영이든 환영이든, 그것을 그려내는 그림도 지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은 자연을 위장한 그래서 없어질 수밖에 없는 풍경을 자기의 프레임(영역, 몸)으로 재현한 후 그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한 근거는 ‘풍경에 의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풍경 안에 풍경이 있고, 풍경 밖에 풍경이 있듯이 서로가 엇갈려도 ‘풍경’은 反풍경에 의해 존재하는 이유이다.

안경수는 실재의 풍경 속에 인공적인 풍경이 드리워진 ‘막’(膜, 인식의 망막)너머에 무엇을 찾으려고 한 것일까. 막 너머에는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공허한 풍경, 그 자체로 존재할 지도 모른다. 그 풍경이 작가에게는 무한한 풍경의 회귀본능으로서 다가설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릴 적 버려진 가벽으로 집을 짓거나 해체하며 개념 없이 놀았던 본능에 이끌림일까.

그는 이제 ‘바리케이드 풍경’을 뒤로 하고 다시 조금 색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공터로 향한다. 이곳은 어떤 대상의 풍경보다는 시공간이 머무를 수 있는 무형의 장소다. 결과적으로 덧씌워진 의미들이 점차 없어지는 형국이다. 풍경의 장소에서 난리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음에는 풍경을 재해석한 의미들이 사라지고 텅 빈 여백의 공간만 남겨진다.

그 다음의 여정은 알 수 없지만 불혹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에 ‘채우고-비우기’를 통해 미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그리고 어떻게 인생의 여정을 채워갈 지를 알아챈 것 같다. 그는 “풍경을 바라보면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재를 얘기하며, 미래를 상상한다.”고 했다. 풍경을 통해 쉽고 명확한 해안을 터득한 그의 보편적 논리는 추상적일 수 있는 ‘풍경의 풍경’의 의미를 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