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lish | Korean

구조 속 개인의 몽환과 절망


김준기 [미술 비평가]



상처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 상처를 고착화하는 깁스를 몸에 지니고 있는 인물을 통해서 사회의 구조적 장애를 도출하려는 의도에서 그려진 문제적 캐릭터 ‘어렸던 왕자’를 그려온 안경수가 그 인물을 모종의 상황설정 속에서 재조명하는 신작을 선보인다. 어렸던 왕자는 깁스(gibs)를 한 소년으로써 장래를 가진 성숙한 미숙아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깁스는 트라우마, 즉 떨쳐버릴 수 없는 정신적 외상 같은 것이다. 벗어버리고 싶지만 그것을 벗어버리면 상처가 노출되어 버리고 마는, 따라서 자신의 상처를 보호해주는 틀을 몸의 일부로 지니고 있어야 하는, 떨쳐버릴 수 없는 구조(물)인 것이다. 그의 몸과 팔과 다리를 감싸고 있는 깁스는 신체 외부의 구조물에서 신체 그 자체로 전환한 것이다. 신체의 외부 구조물이 신체를 대체하는 역전현상 같은 것을 통해서 그는 인간의 내면으로 침투하는 외부의 그 무엇을 하나의 실체로 인정한다. 그 신체를 그는 사회의 구조로 확대한다. 구작에 등장하는 어렸던 왕자는 자신의 몸에 부착된 깁스를 지닌 인물로서 개인에게 각인된 구조의 흔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신작의 인물은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작가가 설정한 상황, 그러니까 플레이룸(playroom)이라는 설정공간의 상황 속에 놓은 인물로 나타난다.

안경수는 근작들에서 구조 속 개인의 모습을 보다 서사적인 상황설정을 통해서 담아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개인들은 장애를 안고 있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장애란 육체적 장애뿐만이 아니라 구조적 장애를 포함하고 있다. 육체적 장애와 또는 정신적 장애와 같이 한 개인의 신체 구조를 통해 매개되는 장애는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장애로 그 의미를 증폭한다. 이러한 문제적 인물설정의 출발은 개인의 결핍에 대한 얘기로부터이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허무한 삶에 대한 일종의 가학적인 염세주의 같은 것도 담겨있다. 그는 이러한 염세적인 세계관까지도 숨기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개인을 옭아매는 사회의 구조를 비관적이고도 몽환적인 태도로 담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개인에게 덧씌워지는 구조의 그림자를 그릴 뿐이다. 개인의 신체에 각인된 사회의 구조를 보려는 것이다. 신체를 통해서 구조를 보려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개인을 그림으로써 간접적으로 사회를 말한다. 이러한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현실을 파편적이고 즉발적인 사건의 나열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매우 체계적인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신작에 두루 나타나는 일련의 정물과 장면설정들이 그러한 구조에 대한 접근을 말해주고 있다. 커다란 패널 네 개를 이어 붙여 그린 대작 ‹플레이룸-암울한 정물›은 인물과 정물을 병렬해놓은 초현실적인 몽환의 세계이다.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어렸던 왕자는 예의 캐릭터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배경이나 상황설정용 기물들에 비해 사뭇 다르다. 먹의 번짐과 세필의 섬세함과 부드러운 선의 반복이 중첩되어 인물은 그의 외부와 명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장판지 위에 그린 이 그림은 매우 섬세한 인물의 부분 묘사와 그 외부의 널찍한 면분할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렇게 원색으로 구성된 색면을 쓰는 것은 안경수의 이전 작업들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이례적인 변화이다. 깁스를 하고 있는 인물상만을 그려냈던 두 번째 개인전과 뚜렷하게 대별된다. 그의 구작들은 주로 수묵담채로 그린 부드러운 곡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배경은 생략하거나 아니면 형상이 있어도 그저 인물을 부연하는 조연 정도였다. 이에 비해 그의 신작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공간구성을 통한 서사를 시도하고 있다.

이 그림이 문제적인 것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정물들과 인물의 설정이 암시하고 있는 상황논리이다. 큼직큼직하게 나뉜 배경은 바닥과 벽과 그 뒤의 쭈뼛한 공간으로 이뤄졌다. 붉은 색조의 벽은 이 그림 전체의 색을 좌우하는 주조색으로 작동한다. 그는 이러한 배경색들의 채색을 테이핑 작업을 이용해서 매우 선명한 면분할 공간작업으로 마무리 한다. 놀이방이라는 제목이 드러내듯이 작가가 설정하고 있는 공간에는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를 비롯한 각종 놀이기구와 장난감 같은 기물들로 가득 차 있다. 좌우에 걸쳐 길게 드리운 파이프 구조물들 사이로 이전의 어렸던 왕자 연작에서 등장했던 깁스들이 독립된 사물로 등장한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곰돌이 인형들과 목과 손 등을 감쌌던 깁스 덩어리들이 혼재해 있다. 바닥에는 창살이 있는 하수구가 있고, 벽에는 빛을 투과하지 못하는 유리창이 없는 가짜 창문이 소통의 단절을 암시하고 있다. 군데군데 손바닥이나 원시적 유기물 같은 개체들도 있다.

이러한 정물들의 초현실적인 배치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퀭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우주복을 입고 있는 이 인물은 안경수가 재창조한 가상의 캐릭터인 어렸던 왕자다. 그는 우주복을 입고 얼굴에는 투명 유리를 쓰고 있는 이 인물은 영락없이 구조에 포박된 채 자아를 상실한 나약한 개인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실체인 모나드(monad)로서의 개인이다. 이렇듯 고립된 개별자에게는 네트워킹이란 부재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외부와 소통할 수 없이, 오로지 초월적 절대자의 힘에 의해서만 작동가능한 외부와의 소통을 갈망하는 나약한 개체의 모습이다. 안경수의 그림이 염세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독하게 절망을 드러낸다. 그 절망의 끝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이렇듯 구조 속 개인의 절망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은 지극히 관념적이다. 그는 개인과 사회에 관한 자신의 세계관을 시각화 한다. 그는 자신과 자신 주변과 우리 사회 구조의 모습을 몇몇 가지 도상들을 동원한 공간과 상황의 설정들을 통해서 철저하게 관념의 세계로 압축한다. 그가 만들어낸 관념의 세계는 염세적이며 몽환적이고 동시에 폐쇄와 단절의 절망에 깊숙이 빠져있다.

이렇듯 암울하기 그지없는 정물을 그려내는 안경수의 내면은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절망을 넘어서는 매우 낙천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다.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작가의 마음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괴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해명하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을 작가의 전략이라고 해석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와 결과의 차이 때문이라고 보는 길이다. 내가 볼 때 안경수는 전자의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개인과 사회를 다루는 데 있어서 안경수는 매우 치밀하게 구조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쾌락의 구조를 다루고 있는 ‹플레이룸›은 더욱 더 명확하게 안경수의 전략적 선택을 드러내고 있다. 스프링을 달고 있는 동물 모양의 놀이기구들이 좌우로 배치된 이 그림의 한 가운데는 놀이기구의 속도나 위험성을 보호해주는 좌석 위에 어렸던 왕자가 앉아있다. 놀이기구는 일시적인 쾌락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시스템에 의해서 조작되는 구조적인 쾌락일 뿐이다. 그것은 은폐되고 위장된 폐쇄와 단절을 의미한다. ‘인공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기구’로 올라탄 어렸던 왕자는 우리의 삶이 체계적으로 쾌락을 제공하는 놀이기구와 같이 구조화된 공간 속에 놓여있음을 드러낸다.

특별한 상황설정 없이 인물만을 등장시키는 그림도 있다. 우주복을 입고 있는 어렸던 왕자이다. 그는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머리 부분에 어디론가 호스를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변의 나체의 인물상들은 여전히 소통불능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두 명의 어렸던 왕자가 등장하는 상황에서도 서로의 머리 부분으로 연결된 호스는 외부와의 소통보다는 모나드끼리의 한정된 소통을 의미한다. 코끼리가 엉덩이에 달린 놀이기구 주변의 인물들은 보다 전향적인 의미에서의 탐구와 모색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인체들이다. 어렸던 왕자의 정형화된 인물 표현에서 벗어난 다양한 동세를 가지고 있는 누드 인물들의 등장은 모종의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노트에는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어렸던 왕자 군상과 낙하산 타고 내려오는 깁스들도 있다. 그는 이러한 에스키스들을 통해서 시스템의 명령에 의해 작동하는 집단적인 복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자신과 그들, 우리 모두의 실존을 탐색하고 있다.

그의 작업실은 일산의 주택가에 위치한 지하공간이다. 그는 스스로 '지하의 은둔생활'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공간에서의 작업을 통해서 매우 내밀한 관념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삼십대 초반의 화가. 그림 속 어렸던 왕자는 부분적으로 작가를 닮았다. 그는 그림이 좋아 그림을 시작했고, 이십대를 넘기면서 화가 주체로 세상을 살고 있다. 낮에는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밤에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한다. 밤을 꼬박 세워가며 화면위에 형태와 색채와 구도와 서사를 담아낸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자신을 털어놓은 유일한 출구이다. 예술행위란 바깥과의 소통이기 이전에 자신과의 대화가 아니던가. 안경수는 당분간 염세적인 관념의 세계를 좀 더 깊게 밀어붙일 모양이다. 그것은 당분간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그 절망의 끝을 보는 것이 그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은 그에게 작업실 바깥의 삶의 역동을 작품 속에 끌어들이도록 허락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는 당분간 관념적인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끝이 안보일 정도로 깊은 내면으로 파고들 것 같다. ‘절망을 이야기함으로써 희망을 끌어낸다’는 식의 식상한 수사는 집어치우자. 만약 절망의 끝이 있다면 그는 다시 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제도(system)는 인간의 삶에 안정과 질서를 유지시킨다’고 말하는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관념의 끝에 다시 냉엄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곳 절망의 끝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