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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수개인전 <막> 감각의 삼투압이 일어나는 막(膜)

안소현 / 아트스페이스 풀 디랙터



무엇

“나는 이제 그가 그리는 그 무엇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 평론가 김현주는 안경수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물론 그것은 작가를 오래 지켜봐 온 평론가가 이제는 작가가 어떤 것을 선택할 지 낱낱이 안다는 뜻으로 쓴 문장이지만, 문득 그것이 안경수의 그림의 특징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나는 그가 무엇을 그리는지 궁금하지 않다”라고 하는 대신 “그가 그리는 그 무엇이 궁금하지 않다”고 했다. 이 표현이 댓돌 밑에 숨겨둔 열쇠 같았다.

안경수는 ‘무엇’을 그리는가? 물론 그의 그림에서 재현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돌, 숲, 나무, 건물, 공터... 장소들은 현실에 엄존하며, 친절하게도 제목은 대부분 간결한 대상으로 되어 있다. 심지어 작가는 그림의 대상이 된 장소에 다시 그림을 갖다 놓고 사진을 찍어 보여주기까지 한다(<빈 터>(2015)). 그는 행여 관객이 자신의 재현의 이면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추측할까봐 염려라도 하듯, 언어와 사진을 통해 대상을 눈 앞에 직접 끌어다 놓는다. 그렇다면 안경수는 왜 이런 것들을 그렸는가? 일상의 특별함? 변변찮은 것들에 대한 찬양? 낡은 것들에 대한 연민? 안경수의 시선에서 그런 지루한 온기를 감지한다면 지나치게 긍정적이다. 녹물이 배어날 듯한 덤불 너머 우중충한 콘크리트 건물(<슈퍼마켓>(2016))이나 쓰레기로 뒤덮인 화단의 네온 장식(<전야>(2016))은 세기말의 풍경이나 폐허로 보일만큼 우울하다. 그렇지만 <분홍 나침반>(2015)이나 <메운 구멍>(2015)에서 읽히는 건조한 형태적 관심 같은 것을 보면 그의 수많은 작품들을 우울의 정서로 묶어버리는 것 역시 지나친 단순화 같다. 그렇다면 안경수는 왜 이런 장면들을 선택한 것일까?

질문을 달리 해보자. 안경수가 그리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관습적인 눈은 흔히 사물을 배경으로부터 오려내고, 오려낸 그 ‘무엇’을 개체라 부른다. 우리는 쉽게 개체를 특정한 형상의 테두리 안에 갇힌 질료로 이해하며, 그 개체들이 나열되고 만나 세상을 구성한다고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안경수의 눈이 멈춘 곳에서는 개체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빈 터>(2015)에서 가장 큰 시각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은 다름 아닌 화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선들, 그것을 중심으로 매끈한 면과 거친 잡초들이 나뉘는 부분이다. 그 경계선을 중심으로 양쪽은 다른 강도(強度)를 갖는다. 균일함의 정도, 인공성의 정도, 단단함의 정도에서 모두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는 이 장소가 일정 시간을 거치며 어떤 작용(예를 들면 잡초의 씨앗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라는 작용)을 겪으면서 비로소 선명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 풍경이 안경수의 눈에 들어온 과정을 다시 기술해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작용의 반복으로 인해 차이가 선명해져서 그것이 경계가 되고, 그 경계로 인해 비로소 개체와 그 환경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풍경이 이미 인상적인 개체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경이 안경수의 눈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체들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개체는 경계를 중심으로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개체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개체(individual)”가 아니라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한다. 노랑이 있어야만 검정이 선이 되고(<검은 선>(2015)), 어둠과의 차이를 통해 잔디의 존재감이 드러난다(<밤잔디>(2015)).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이 위상의 차이를 갖고 있고, 상대를 통해 개체성을 획득할 때 그 투과성을 가진 경계를 생물학에서는 다름 아닌 막(膜)이라 부른다.

막의 여러 좌표들

안경수가 전시제목을 “막”이라 정했다고 했을 때, 그 적절함이 매우 놀랍고 반가웠으나 작가에게 굳이 그 개념의 사상적 함의들을 설명해야 할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안경수의 그림에서 막은 이미 여러 좌표축을 따라 펼쳐져 있었고, 작가는 어떤 생물학적, 철학, 미학적 설명보다 예민하게 막의 속성을 인지하고, 막을 다양한 각도에서 읽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자신의 모든 그림 자체를 어떤 풍경의 일부에 자신의 감각을 끊임 없이 투과시킴으로써 형성된 하나의 막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관점은 그가 그림을 그린 뒤 해당 장소에 그림을 가져다 놓고 사진을 찍는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림이 되었던 풍경으로 다시 돌아가 그 풍경의 일부가 되는 과정은 그 장소에 주목하게 한다. 그림 그 자체 안에서 시선이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장소로 확장되며 그 장소를 흔든다. 풍경의 일부 부조화스런 레이어가 되어 임시로 자리하되, 더 이상의 의미를 보태지 않는 것, 그것은 단편적 일지라도 그 사이를 온전히 유지하며 관계 하려는 소박한 시도이다.”
– 작가 노트 중에서

나는 처음에 안경수가 찍은 사진들에 대해 그것이 사진과 회화라는 장르에 대한 초보적인 고민으로 읽히거나, 작가가 자신의 묘사력을 뽐내는 것쯤으로 오해될까봐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실제로 안경수를 두고 ‘회화적 기교’에 치중한다며 의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노트에서 읽을 수 있듯이 작가는 사진 매체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풍경과 자신의 캔버스 사이의 관계를 보여줄 가장 소박한 방법을 찾았던 것 같다. 그의 그림은 풍경의 일부와 닮았지만 풍경으로부터 일종의 ‘감각의 삼투압’을 일으켜 추출한 요소만을 갖고 있거나, 반대로 원래 풍경에는 없지만 스스로 더한 요소(그가 화면 위에 흩뿌리는 물감이 대표적이다)를 갖고 있다. 캔버스라는 막을 사이에 두고 그의 그림에 대한 이쪽의 경험과 저쪽의 풍경 사이에는 임시적인 위상차가 있다. 안경수 역시 모든 회화 작가가 그렇듯, 혹은 그러해야 하듯, 시각적 재현 매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러나 그는 회화를 밀쳐내는 매체를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그림과 세계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 그의 모든 작품이 하나의 막이긴 하지만, 이런 막으로서의 그림의 속성은 <가파른 땅>(2015)이나 <기둥2>(2015)에서 보이는 가까이 다가간 화면들에 특히 잘 드러난다.

안경수가 주목하는 또 다른 막은 화면 안에서 이질적인 두 공간이 붙어 있는 경우에 나타난다. 이미 언급한 <검은 선>이나 <밤잔디> 외에도 활주로에 관련된 일련의 그림들에서 공간들 사이의 막이 등장한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때를 떠올려보면 얼룩덜룩하게 보이던 땅이 활주로와 그 주변으로 나뉘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활주로2>(2015)). 착륙한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땅 위를 달리고 있을 때 비행기 창문 너머로 펼쳐진 활주로 풍경을 보면, 매끈한 두 면이 막을 경계로 맞닿아 있는 것 같다가 비행기의 속도가 줄어들수록 질감의 차이가 커지기 시작한다(<활주로1>(2015)). 착륙의 지표가 되도록 활주로에 표시해놓은 붉은 동그라미 표시들이 마치 그 주변 환경으로부터 튀어나올 듯 보일 때도(<분홍 나침반>) 경계로서의 막이 잘 드러난다. 거친 배경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매끈한 기둥이나 쇠막대기, 깨진 시멘트 판, 구멍 등도 마찬가지이다(<쇠막대기>, <쇠기둥>, <무너진 돌>, <반듯한 구멍>, <메운 구멍> (이상 2015년 작)). 이 때 막들이 반드시 매끈하진 않다. 경계는 때로 울퉁불퉁하고 임시적인 선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안경수의 그림에서 막이 포착되는 또 다른 경우는 캔버스 위에 여러 막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는 것 같은 장면이다. 최근작에서는 유난히 이런 복수의 막들이 많이 눈에 띈다. <옥상>(2016)과 <슈퍼마켓>에서는 덤불이나 나무로 이루어진 막이 건물의 막을 덮고 있고, <장막>(2016)에서는 전깃줄들이 모여 이루는 성긴 막이 공사용 포장막과 그 뒤에 숨겨진 (어느 정도 완성되었는지 알 수 없는) 건물의 막 위에 포개진다. <전야>에는 오색 꼬마전구가 이루는 불빛의 막이 뒤엉킨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막, 도로의 막, 심지어 쓰레기들이 이루는 막들이 서로 겹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막들이 반드시 공간적으로 서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공간 속에 마구 뒤섞여 있어 아예 좌표를 읽어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안경수는 시각적 삼투압을 일으켜 투과된 막들을 분리해서 “보아낸다”. 이런 막들은 떠밀려 와서 쌓인 듯한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에 뒤엉킨 <정물화>(2016)에서 가장 복잡한 구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도무지 공간적으로 분리해낼 수 없는 이 이미지 앞에서 오로지 색과 질감으로 추출해낸 구멍이 숭숭 뚫린 막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가끔은 위의 다양한 막들이 한꺼번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하얀 어떤 것> (2015)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화면의 위 아래를 분리시키는 모호한 막이 있고, 위의 어두운 화면 위로 정체불명의 ‘하얀 것’이 떠 있다. 언제나 그랬듯,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이 때도 막을 뚫고 넘어가는 힘을 지닌 것은 시각이다. 눈은 공간의 벡터를 마구 넘나들며 막들을 추출한다.

회화의 개체화

안경수가 무서울정도로 고집스럽게, 성실하게 회화에 매달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지금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의 한 귀퉁이에라도 그의 그림을 위치시킬 수 있을 만한 비평적 깜냥을 내가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고 미안해진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안경수는 자신의 감각과 세계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그의 그림이 회화사 어디쯤 위치할 지에 관한 것 따위는 아랑곳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가끔은 그의 그런 태도 때문에 비로소 회화가 ‘무엇’인지 느껴지기도 한다. 직전의 예술적 흐름들을 따박따박 부정해가며 살아남은 다른 매체들과 달리, 회화는 자신을 세계로부터 구분하면서 스스로 살아남았다. 그렇게 본다면 이 유구한 매체가 이 정신 없는 매체폭증의 시대에 살아남은 이유는 딱딱한 껍질로 자신을 보호하는 ‘개체’로 굳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부여되는 임시적이고 유동적이고 성긴 규정들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환경으로부터 차별화하는 ‘개체화’를 진행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안경수의 그림들은 회화라는 매체가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는 그 개체화 과정에서 이미지를 걸러내고 추출하는 세포막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경수는 그의 미세한 감각의 삼투압 작용을 통해 회화의 생존을 위한 양분들을 분주하게 걸러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