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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

풍경은 수많은 겹이 중첩된 구조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러한 풍경의 구조를 시간과 장면의 평면적 레이어로 나눈다. 그렇게 해체되는 모든 풍경의 겹은 거리와 규모에 상관없이 모두 선명하다. 그리고 모든 겹의 무게는 같다. 그 많은 풍경의 겹 사이에 내가 바라보는 것은 파편들, 부산물 이라 부르는 소위 폐허의 장면이자 해체된 레이어이다. 우리가 폐허라 부르는 장면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서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풍경들 사이에서 불특정한 혼재된 상태나 불완전성의 무질서한 상태를 포함한다. 예를들어 길을 가다 순간 발견하게 되는 철거된 쓰레기더미들이나 잉여의 방치된 터를 아우르는 풍경들이다. 이런 파편화된 풍경들, 곧 폐허는 늘 우리의 삶의 풍경에 중첩된 레이어의 한축으로 감각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마치 오랫동안 퇴적된 지층처럼 그 겹은 현재의 풍경 사이에 있다. 폐허는 그렇게 형상에서 감각으로 잔존한다.
내가 페허를 보는 이유는 폐허에 대한 감각을 쫒기 위한 것이다. 그 감각이란 것은 명확한 형태로 구술하기 어려운 마치 유령같은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감각이 풍경의 시간 사이에서 가시화되는 순간, 우리는 풍경의 존재를 질문하고 애도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풍경의 과정을 매 순간 경험하며 새로운 풍경을 마주한다. 결국 현재의 풍경은 폐허의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 그림은 그렇게 수없이 쌓여가는 풍경의 레이어 그 사이에 존재한다. 나의 그림은 그 폐허의 형상이 잔존하는 시간대에 자리하고, 잔상과도 같이 현재와 미래에도 폐허를 감각화한다. 다시 말하면 폐허는 삶을 유예한다. 그러나 엎어지고 덥히고 파헤치는 풍경의 극단에서도 삶은 저항하고 숭고하게 한다. 풍경의 숭고함은 혼종된 더미들 사이에 있는 각각의 사물들로부터 질감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내일의 풍경에 대해 애도하게 한다.